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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10, 2010

The Concept of God and Believing (; written in Korean)/ 신 개념과 믿음

2001년 8월부터 평신도 교회 새길교회 토론실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신], 종교, 믿음 등에 관한 생각들을

상황이 발생하는대로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올렸습니다.
그 이후에 올린 글들의 일부를 편집, 그리고 보완하고 새 글을 추가하여
아래에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그 글들의 분량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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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지나서
예전의 웹 링크 주소가 아주 많이 바뀌었기에
여기에 글 조각 하나 하나의 웹 링크 주소를 일일히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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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8. 어떤 분의 글에 대한 답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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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성]

저의 개인적인 모래성의 모래알들을 보면
궁극은 신을 넘어선(말의 한계가 있습니다) 삶(다른 의미의) 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은 통로일 수도 있고, 삶의 원리일수도 있고, 또 확장하여서는 삶 자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삶에서 나 그대로가 궁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과 하나가되는 궁극이란
"우리"의 조합이 이루어지는 궁극이겠지요.

실상 '나'라는 것이 없는데 ,
우리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의 본질, 석가의 말씀의 본질도 거기에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저의 모래성의 한 알갱이입니다.

예수가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이
'너'를 버려라 인 것 같습니다.

'나'가 없고
사람들과 자연을 포함한 ,'우리',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신성'
그것을 환기시켜주신 것 같습니다.

인간이건, 자연이건 간에 '우리'만 있을 뿐인데
'우리' 속에서 신과 하나됨이 실제의 '우리'이며 '나'이며 '생명'이며 궁극인데
우리는 잘못 개념화된 '나'와 '신'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궁극'이란 개념, 단어를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표현조차 '신성; Gottheit'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나'라는 모래성과 '전통적 교리와 교회제도에서 주입된 잘못된
편협한 신관, 신앙관'의 모래성이
실상은 제한된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하는 순간에
보여지는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이미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 사람들도.

참 'Gottheit'는 그것을 궁극이라 부르건 않건 간에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 자유함 !

어떤 언어적 규정지음을 벗어난
그리고 지적, 영적 능력이 부족한 인간의 범주적 이분법화와
옳다 그르다 편가름을 넘어선
참 '신성'과 '우리'의 하나됨

그 속에는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문제꺼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통로'라고 인식하기보다는 그런 구별조차 없어진
'하나됨', '그 자체'
로 생각하는 것이 저의 모래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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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참사와 진노: 신도 인간의 감정을?

과연 '신이 우리 인간과 같은 감정에 좌우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메타포'가 적절할까?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이 메타포임을 알면서도 실상은 메타포가 아닌 것으로 일상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한계적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들쑥날쑥한 감정과 그에 바탕한 사고가 '신"에게도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모두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상의 삶과 관련되어서, 그리고 우리의 종교적 신앙생활과 관련되어서
우리는 우리가 잘하면 신이 상을 주고 복을 주고,
잘못하면 노하고 벌을 준다는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뉴욕의 대참사 = 신의 진노 !!! 라는 등식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 인간이 진화하여온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사고하는 힘'인 이성, 특히 논리적 이성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요즈음 TV나 가요나 소설이나 시를 도배하고 있는 '로맨틱 러브' 의 개념도 중세 이 전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잘하면 기뻐하고 상주며, 못하면 노하며 벌준다는 개념도 인간이 처음부터 갖고 있던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 진화 역사에서 후에 생겨났던 개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한 인간적 개념, 생각을 창조자인 '신'에게 강요하여 입혀놓는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한계적 사고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지방의 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많은 짐승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신의 노염도, 신의 축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연이 신의 섭리대로 작동하는 과정상에서 일어난 자연 전체현상의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식물의, 동물의 한 개체의 죽고 삶은 '신'의 노여움과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신'이 태초에 만들어 놓은 그 섭리를 구현하여 주는 작은 물방울의 들고 남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한 개체의 생각과 행동 하나 하나의 잘잘못은 신의 기쁨과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냥, 인간의 감정을 빌어 메타포로 이야기한다면
그저 담담히 그 현상을 보고 수용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는 뜨고 집니다.
그것에 기뻐하거나 화낼 것이 없습니다.

개체의 삶과 죽음의 어떤 형태 그 자체를 넘어서서 드러내려는 신의 참 뜻, 섭리,
그것이 중요할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 만들어낸
상 과 벌의 개념
그리고 기쁨과 분노의 개념
이러한 인간적 개념을 '신'에게 입히는 일상적 사고 연습을 멈출 때에
그것이 하나의 메타포임을
일상에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을 멈출 때에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신의 개념, 신과 우리의 참 관계의 개념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 때에
에크하르트가 말한 '참 하나님' '참 Gottheit'가
나의, 우리의 내부에서 나와, 우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

기존 교단의 입장과는 맞지 않는 입장이지만 제 생각에는 궁극적으로 기독교가 살아남고 설득력이 있기 위하여는 이러한 입장으로 기본 믿는 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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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과 벌]의 원리가 신의 속성일 수 없다.

위의 글과 관련하여 더 생각하여 본다면
다시 강조하지만 " 상과 벌" 의 개념은 인간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행동을 잘하면 하늘로부터 보상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종교에 도입되어 시작된 것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되었고 ,조로아스터에 의하여 유대교, 힌두교 등에 전달된 것이라고 문화사는 이야기하고 있군요. 인간이 이러한 개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식의 사고,
잘하면 상, 못하면 벌 !
그것을 신에게 덮어씌운다 ??? !!!

인류의 지적 능력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단계에서 시도된
유아적 생각일 것 같습니다.
참 신성, 참 Gottheit 라는 존재가
그러한 유아적인 인간적 2분법적 개념인 상과 벌을 중심으로 그의 창조세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에서 나온 유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참 Gottheit는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참 신성은 그러한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개념의 발달은 그 개인의 지적 능력 수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도덕적 발달을 지적 발달 수준과 연결시킨 이론을 제시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심리학자 Kohlberg 교수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성 발달은 지적 발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1, 2 단계는 생후 4세에서 10세 사이의 아동 단계로서,
1단계는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규범에 맞는 행동을 하는 단계,
2단계는 보상을 받기 위해 타인이 만든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단계,
지적발달이 더 이루어진 단계인 3,4 단계는 10세에서 13세 소년기의 단계로,
3단계는 타인을 기쁘게 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규범적 행동을 하는 단계,
4단계는 법과 질서 지향적이어서 의무로써 규범을 지키는 단계,
5단계는 사회적 계약과 합의 의한 기준을 따르는 단계,
6단계는 양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보편적 도덕성 단계,
7단계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주의 일원으로서의 존재적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위를 하는 단계입니다.

지적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어릴 때는 인간은 상과 벌의 외적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지만
성숙한 인간이 되면 이를 넘어서서 보다 상위 수준의 규준에 의하여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도 성숙되면 이러한 단순한 상과 벌의 규준이라는 아동기적 개념화 수준에서 벗어나는 데,
하물며 신을,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는 그러한 존재 개념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적 수준이 낮은 단계의 사람들 중심으로 신이 세상을 운영한다???
정말로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볼 때, 신이 이 세상을 그러한 상벌의 단순 원리로 운영한다는 것은 신의 본질을 너무 격하시키는 것 같습니다. 개개 인간의 행동에 따라 상과 벌, 심판을 내리는 그러한 단순한 신의 개념화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뉴욕의 대참사, 아프리카의 전역에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퍼진 에이즈! 그 개념틀에 맞지 않습니다.
상과 벌의 원리의 신???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데에서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기복신앙 중심의 관점이
수많은 문제를 생성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진정한 성숙한 인간은 상과 벌의 원리에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넘어서는데,
하물며
신이,
지적 수준이 덜 발달된 미숙한 인간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수준인 상과 벌 중심으로
우주를 움직여 나간다는 생각은
그러한 생각을 도입한 조로아스터의
아니면 그 당시와 현대까지의 일반인들의
지적 능력의 한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참 Gottheit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상과 벌의 원리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우주를 운영하는 존재가 아닌,
그러한 개념이 없는 신을 생각하는
개념화의 전환이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인간 행동에 대한 신의 진노???
새로 개념화된 신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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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참 신성Gottheit

참 신의 개념이란
우리의 생각 속에, 우리의 행동 속에 살아있는
나와 하나인 신입니다.

그러한 신이, 일정한 규정을 세워 놓고
그 규정에 맞게 행한 사람은 상을 주고
아닌 사람은 벌을 주며,
최후의 심판 날에 모든 고가점수를 평점하여 상벌을 내린다는
그러한 류의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의 생각은
아주 유치한 생각이란 것입니다.
인류가 지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만들어낸
부족한 단순한 생각이란 것입니다.
참이 아닌 생각이지요,
인간의 생각이지요
신의 뜻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억지로 신에게
덮어씌운 것이며
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란 것입니다.
그러한 상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지극하게 사랑하는 부모가
아들딸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고 상벌을 내리겠습니까?

아니지요.
부모의 기대와 뜻에 맞게 사는 자녀들은 그 자체로 부모와 하나됨을 누리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녀들은
그 자체로 부모와 하나이지 못하는 불행을 겪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아무런 상벌도 없지요

신을 믿는다면
매일의 생각 속에서, 행동 속에서
신의 섭리에(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맞게 살아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삶은 사는 것이지
신이 따로 우리를 위해서
상과 벌을 '예비'해 둔 것이 아니지요

신자에게는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생각 속에서 내가 행동하는 행동 속에서
이미 신과 하나됨 이외에 그 무엇이 또 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신의 상과 벌의 개념으로 전개되는
모든 종교적 개념들, 제도들, 예식들, 말들....약속과 규제와 협박들

모두 다 지적으로 미숙한 인간이
미숙한 자신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들어내어
억지로 신에게 갖다 입힌 덧옷, 덧칠이란 것입니다.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으로 미숙한 , 인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근원적 존재
참 존재라는 것입니다.

상과 벌의 개념 !
그것을 깨끗이 빼어 버릴 때에,
그리고 보다 높은 수준의 원리의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줄 때에
비로소 하나의 종교는
참 신의 개념과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재개념화된 신의 개념 위에서
그 종교의 교리가 전개되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

If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If 진리의 먼발치에라도 간 생각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If 위의 이야기가 진리의 먼발치에라도 간 것이라면
Then 우리는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지요.

온갖 왜곡된 신성Gottheit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참 자유함을 얻는 것이지요

그 참 자유함이란,
참 신의 개념 안에서
보다 상위의 원리의 신의 세계 안에서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우주적 삶의 신의 원리 안에서
신과 보다 더 밀접하게 하나됨의
자유로움이고
그것은 아동기적인 유치한 단순한 수준의
신의 '상벌 원리' 위주에 따른 삶이 아니라
보다 깊고 넓고 본질적인 의미의
우주 창조와 경영의 신의 원리 안에서
그 원리와 내가 일체가 되기 위하여
무한한 책임과 의무와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개념의 “신” 속에 '매임'을 통하여

참 자유함을 얻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과
동식물과 물리적 환경을 포함한 모든
'너'가
바로 '나'임을
깨달아 알고
끊임없이 '나'인
'너'에 대하여
신의 넓은 '사랑, 자비'의 의미를
구현하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참 자유함을 얻는 것이고
신과 하나되는 삶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러함을 통해
나 속에
신이
항상,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신앙인으로의 나의 삶이
상벌 원리에 의해 좌우되어 이뤄진다면
이미 신과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지요.
괴리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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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조건적 사고 (if-then)가 하나님의 속성일까? ]

- 1. 문제의 제기 [Version 2.0]-

인지발달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한 아기가 태어나서 if- then 식 조건적 사고를 바로 할 수는 없다.
오랜 기간을 거쳐 나이가 들고 부모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점진적으로
조건적 사고가 발달하게 된다. 상당한 기간과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것도 부모, 사회적 feedback이 없으면 형성이 잘 안 된다.
조건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어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또한 조건적 사고에 , 자신이 타인에게 무엇을 줌과 안 줌 (giving and not-giving)을 연결하는 사고가 발달하는데 또한 시일이 걸린다. 또한 긍정적 결과와의 조건적 연결 사고를 넘어서서
부정적 결과와의 조건적 연결 사고가 발달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타인이나 외계 대상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if 네가 ....면, then 나는 ...... 한다
는 조건적 사고에 의존하는 것은 지적 수준이 낮은 수준의 생각 형태이다.

진화적으로 보아서도 인류 초기부터 조건적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처음부터 조건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님과 같이.
현재에도 어떤 미개 종족에서는 조건적 사고는커녕 단순한 추리도 하지 못하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이 우주를, 인류를 경영하심에 있어서
그런 1)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은 조건적 사고 원리에 의하여
2) 낮은 수준의 사고방식인 , 조건적 사고에 줌과 안줌을 연결하는 사고에 기반하여
이 우주를, 인류를 다스리신다???

신성(Gottheit)을 그런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과거(구약, 신약 시대)와 현재(오늘날의 한국적 기독교)의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의 참 속성!

if-then 식의 유치한 인간적사고 방식을 넘어서는
다른 속성의 신일 수밖에 없다.
'신은 if-then 식의 조건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내 친 김에 한 걸음 더 걸어 나가면
'신은 (인간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괄호안의 내용조차 언급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라는 깨달음을 얻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 신성Gottheit의 깊은 개념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히 어떤 더 근본적 개념에 바탕한 신성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신학에서 제기된 'theistic God을 넘어서는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생각을 해보고 다시 해보아도
신에게 '조건적 사고를 하는 존재'의 껍질을 씌운 것은
인간 지적 능력의 한계인 것 같다.

(인간적) 사고 안하는 신 !
'사고'가 없는 신 !
더 큰, 깊은 의미의 Gottheit으로 닥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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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인지심리학 공부를 통하여
인간의 이성이란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탈합리적인가
(소위)비이성적 속성에 의존하는가를 ,
그리고 일상적인 편향된 개인이 믿으려 하는 바와 개인적인 앎의 바탕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믿음, 깨달음, 이성:
-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경계선이 없이 중복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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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made 기성품,
fast-foods처럼
기성교단에 의하여 주어지는
잘못된 신관, 신앙관, 예수관, 인간관 안에서 안주하는
'생각없는'(스퐁주교는 이를 뇌가 없는 이란 '무뇌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무뇌적 기독인으로 살기보다는

전통적 하나님을 잃어버리고도,
전통적 규범적 신앙을 놓치어버리고도
에크하르트나 유영모 선생과 같이
참 신앙은
깊은 사고에 기반하여야 한다는
확신에서,
치열하고
고통스럽고
또 끊임없는
뼈를 깍는 깊은 생각의 이음과 혼신의 노력이 필요한
험란한 유배의 길을
절박한 심정에서 선택하는
참,
정직한
기독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인을,
특히 한국기독인을
온갖 모순을 자아내는 현 기독교계의 교리, 신앙관에 얽매여
참 하나님의 모습을 못 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각자의 지적 능력의 한계와,
개인적 , 집단적 지적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Deep thinking, honesty,
and courage are the necessary conditions
for the true Christian belief. 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저 밖에
하늘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그러다가 때때로
우리의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영향을 주며,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우리의 선악의 행동 수준에 의하여
최후의 심판날에 주판을 튀겨서
상과 벌을 내리는
그러한 단선적인 인격적 존재' 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고정관념이,

오히려
신의
참 본질,
신과 인간과의 관계,
삶-생명과 신의 관계의 참 본 모습을
못 보도록
가리는 너울임을
치열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
이를 넘어
참 신의 모습에 대한
정직한,
용기있는
참 신앙의 고백을 하여야 하는 사람이
참 기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그러하였고,
스퐁 주교가 그러하였다고 봅니다.
그들은
치열하게 생각하는 기독인이었고,
솔직히 고백하는
정직한 기독인이었고,
용기가 있는 기독인이었습니다.

"신은
나와 너의(기독교인, 불교인, 원불교인 등의 구별이 없습니다.),
자연의,
생명의
심층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존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입니다."

He is not out there up in the sky.
He is not he or she.
He is It.
It is in me, in us,
and in there
(in the nature).

본원적 존재인 그는
내 안에 살아 계신다.
내가 신과 만날 수 있는 것,
함께이고 하나일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내어주는 정도까지만’ 가능한 것이다. "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내어주는 정도까지만’
나는 그와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되는 것은
골방에서,
교회당에서 ‘주여, 주여!’를 부르짖으며
말로, 명상으로 기도할 때가 아니다.

나와 너가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생명에 대하여
모든 자연에 대하여
나를 [내어주며] 삶을 펼쳐나갈 때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조차도 군더더기일 수 있다.
자연, 다른 생명들, 나, 그리고 신,
이 모두가
함께이며
하나이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나를 물 흐르듯이 조건없이, 의도없이
자연스럽게 내어줄 때에,
비로소 신은 나를 통해 살아계신 것이며
그것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우리'라는 신의 생명적 현존 구현 방식의
한 결(마디)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의 속죄,
'나'의 구원이란
없다.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고
그 우리의 삶에 신이 현존하였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이다.

'나'가 아닌 '나'를
내어줌으로써
'충만한 생명의 삶이 전개되는'
'우리' 속의
한 물결, 결로써
'우리'를 통하여
신은 비로소 현존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신의 축복,
사후 심판일에의
신의 심판, 칭찬,
그리고 천당행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지적 미숙으로 인하여
잘못 개념화된 그림일뿐.

내가,
아니 우리가,
우리 안에 신이 현존하는 삶을,
생명의 삶을,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내어줌의 삶,
함께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신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 신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져가게 하는
각종 전통적 교리와 관점의 왜곡과,
고립된 개개인의 자아중심적 무관심과
내어줌 없음의
무뇌적(brainless) 사고와 행위의 질곡으로부터

‘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그를 통해
'신'을 유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치열한,
깊은 생각을 수반한,
용기있고,
정직한 믿음만이
우리가 신과 하나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전통적 기독교의 신관, 교리에 갇혀
유배된 사람,
그러한 것을 잃어서
불확실한 새로운 관점으로 유배된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의하여
본래의 자리에서
인간으로부터 유배된 신. Gott !!!

이러한 유배의 상태를 극복하는
첫 걸음은
Deep thinking,
honesty,
and courage are
the necessary conditions for the true Christian life. 이라고 봅니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필요조건을 넘어서서
이루어져야 할 충분조건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되는
‘너-나의 구분, 차별’이라는 무지 상태를 넘어서서

'너-나-신-자연'이 하나임의 깨달음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줌"의 실천적 삶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생명의 원천이고, 힘이며,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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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은 하나의 fiction 이다.
- 20세기 초의 유명한 사회학자 오토 노이라스는
과학이 진리를 추구하여 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과학이란 항해하는 선박이
끊임없이 갑판을 새것으로 바꾸어 가면
항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그 당시의 인간관과 인간의 지식 수준을 떠난 신학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학이란 계속하여 재구성되며
새로운 해석을 재구성해내야 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본다.
.......

2. 성서 언어의 우상숭배: 문자주의

- 언어심리학을 공부한 나로써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져왔다.
하나는, 표현된 언어의 의미가 어디에서 오는가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언어의 한계성의 문제이었다.

유치원 교재의 언어 표현이건, 성서이건 그 표현되어진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는 언어 표현 자체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을 알지 못하는 아랍 말을 들으면
그 것은 하나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듯이
언어 표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서로 관련짓기로 동조한
어떤 지식을 그 언어표현 (기호)에 연결할 때에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인간을 빼놓고는 인간언어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이러한 언어표현과 듣는자의 지식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항상 일정한 보편적인 의미가 그 언어표현에 주어질 수 없다.
어떠한 지식이 적용되었는냐에 따라서
그 언어표현의 의미가 달라지고,
모든 사람이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의미란 있을 수 없다.
언어표현의 참 의미란 존재하기 어려우며,
참의미가 있다고 하여도
그 의미 전체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인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인간 언어 표현의 의미란
본질적으로 역사적, 문화사회적, 개인적 상대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성서 표현이라도
인간언어로 표현된 성서의 어구의 의미는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다.
오로지 다양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 내의 문자주의(literalism)란
인간언어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편협한 잘못된 생각이다.
- 따라서 문자주의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어를
문자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자구적 의미로 언어를 사용하고 해석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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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죄란 존재들 간의 상호 관련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개별아(self)의 관념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는 지적이다.

[기도]

'나'와 '너'의 구별이라는 문제는
이전부터 생각하여 온
'인간의 최대 지적 한계성'이라는 개념과 부응되는 개념이다.

신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삶의 본질은
'나와 너를 구별함이 없이 '
‘우리'로써 하나되어
조화로운 모습을 이루어 내라'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연의 모습이고, 창조의 근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히
'나', '자신'을 타와 구별한 위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기독교인이라고 칭하고,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를 버리고
다른 열매를 위하여
'빈 쭉정이' 열매나 나뭇잎의 삶을 살려고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신성Gottheit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자는 나에게서의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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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인 '나'의 개념,
'나'와 '너'의 구별과 차별,
저능한 인류의 한계인
'나'가 '내 몸안에만' 존재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나'는 자연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는 생각,

이러한 잘못된 생각의
'비움'까지도
몸 비우기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의 계곡을 흘러내려 가는 물방울 하나가
자기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다른 물방울들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며
다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상 '나'라는 독립된 물방울은 존재하지 않으면,
오직 '우리' 만 있을 뿐이며
'너' 가 '나'이고, '나'가 '너'인데,

실로 자기가 왜 존재하면
무슨 용도에 쓰여지며
무슨 삶을 어떻게 살지를 모르면서
흘러가면서도
'나'를 '너', '타자'로부터 구별, 차별화하며
'너'를 인식 못하거나, 무시하거나,
‘너’의 믿는(흔히 확신하는) 바, 이야기를
‘나’의 생각, 믿음과 다르다고 하여 경멸하거나 조롱하거나
그 ‘너’들이 잘 안되기를 간절히 빌거나

기껏 해야
'연민'을 하고
'협동'을 하는
‘너’, 그들과는 괴리된
물방울로서의 '나'라는 것,

서구적 표현의 한계라는 편향된 생각이 든다.

내가 내 다리를, 내 몸통을 연민하거나
내가 내 다리와 협동한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연민이 아니라 함께 아픔이 있을 뿐이고
너와 나의 협동이 아니라
'나'가 없는
그냥 하나됨, 하나로의 흐름
물처럼 섞임이 있을 뿐이다.

연민과 협동은
[나와 타자가 분리된] '나'가 전제된 연민과 협동,
괴리된 '나'가 해체되지 않은 채의
표면적인 연민과 협동으로 충분한 것으로
오해되기 쉬울 것 같다.

'나', '자기' 가
타자와는 구별된 별개의 단일체라는 '착각',


인류 대부분이 갖고 있는 착각을
벗어날 때에야 가능하여지리라 본다.

타인과 차별화된
'나', '자기'의 개념이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연민(?)과 협동(?)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나'를 버림 없이
'나의 몸과 마음'을 비움 없이
'나'의 몸과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들을
자연처럼 허허롭게 '비움' 없이

'나'의 신에게로의
다가감, 하나됨의 시도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착각이다
'나'라는 것을 생각하고 타자와 구별짓는 것은
인류가 갖고 태어난 극복해야할 숙명이다.
('원죄'라는 개념을 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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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독후감)
: 책제목: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교회감독이 유배당한 신자들에게 고함
저자: 존 쉘비 스퐁 감독 지음, 김준우 옮김
출판사: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이 책에서 스퐁 감독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 교리가 잘못된 토대 위에 서있으며, 그러한 바탕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온 바의 교리, 신앙관, 신관 등은 오늘날에 있어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 되어 버렸고,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과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종교적 실제 상황은 참 신, 참 기독교 신앙, 참 기독교 진리로부터 기독교 신자를 ‘유배’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지적한다. 참 신과 연결이 안 된, ‘거의 아무런 내용이 없는 개념들만 손에 쥐게 하는’ 종교적 관점을 강요받으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종교 현실에 할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공간인 하늘에 초자연적 인격적 존재로서 천사를 거느리시고 계시며, 전능의 ‘왕’으로써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시어 좌지우지하시고, 인간들이 수많은 고통과 전쟁을 겪도록 내버려두시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 존재하시며, 최후의 날에 성경에 쓰인 바에 따라 인간의 잘잘못을 심판하여 상과 벌을 내리는 그러한 유치한 유신론적(theistic) 개념의 신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음을,
그러한 신의 개념을 고집하는 한에서 인간은 참 신과는 멀어진 유배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스퐁 감독은 강조한다. 신은 그러한 유아적 개념의 인간적, 인격체적인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 안에 내재하여 게시며 생명의 무한한 중심이며, 존재의 근거이며, 사랑의 원천이며, 끊임없이 우리의 잠재적 가능성을 현실성이 되도록 불러내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신약에서 전개된 예수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시의 기독인들의 내적 응집성과 외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몇 십년에 걸쳐 수정되고 재구성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의도적 담화이었기에,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내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본다.
초기의 신약에는 인류의 대속자로서,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개념이 없었음과, 후대의 로마점령 하에서의 교인 내부 결속과 유태교와의 관계 규정의 목적으로 구원자, 속죄양의 개념이 뒤늦게 도입되었음을 지적한다.
원죄의 개념과, 예수를 통해 인류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속죄, 구원된다는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즉 성경을 역사적 사실과, 텍스트 해석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며, 신이 육신이 된 예수, 유일한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예수, 신의 의미의 본질인 사랑의 삶, 내어줌의 삶을 통하여 신의 참 의미를 인간에게 보여준 예수로서 재 개념화하여야 함을 주장한다.
책의 10장 ‘새로운 시대에서의 윤리의 새로운 기초’의 후반의 스퐁 감독의 말은 그가 신, 인간, 삶, 생명, 예수, 윤리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참 이해와 통합적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을 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신은 .....외부 하늘에 인격체로 존재하며 상벌을 내리시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깊이와 근거이다. 신은 나의, 우리의 안에 내재하여 계시며, 나의 일부이다.”
.......
기독인, 특히 한국기독인이 온갖 모순을 자아내는 현 기독교계의 교리, 신앙관에 얽매여 참 신의 모습을 못 보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각자의 지적 능력의 한계와, 개인적, 집단적 지적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참 기독교적 신앙의 필요전제조건은 깊은 생각, 정직성, 용기라고 본다. '신은 저 밖에 하늘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하며, 때때로 우리의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영향을 주며,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우리의 선악의 행동 수준에 의하여 최후의 심판날에 상과 벌을 내리는 인격적 존재' 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고정관념이,
오히려 참 신, 신의 참 본질, 신과 인간과의 관계, 삶-생명과 신의 관계의 참 본 모습을 못 보도록 가리는 방해물, 가리개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치열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깊이 생각하여, 잘못된 개념을 넘어서서 참 신의 모습에 대한 정직한, 용기있는 참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 참 기독인이라고 생각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그러하였고, 다석 유영모 선생이, 스퐁 감독이 그러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치열하게 생각하는 기독인이었고,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있는 정직한 기독인이었다.

기성품처럼 현재 기독교단에 의하여 주어지는 잘못된 신관, 신앙관, 예수관, 인간관 안에서 안주하는 '생각 없는'(스퐁 감독은 이를 뇌가 없는 이란 '무뇌적‘이란 표현을사용하였다.) 기독인으로 살기보다는,
전통적 기독교가 주창하여온 그릇된 신 개념을 잃어버리고라도, 전통적 규범적 신앙을 놓치어버리고라도, 신앙적 불확실성의 불안한 상태를 감수하면서라도,
참 신앙인은 유영모 선생이나 스퐁 감독과 같이 깊은 사고에 기반한 신앙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확신에서, 치열하고 고통스럽고 또 끊임없는 뼈를 깎는 생각과 혼신의 노력이 필요한 신앙적 유배의 길을, 절박한 심정에서 선택하는 참, 정직한 기독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신은(그리고 참 신앙의 길은) 성경에서 확정적으로 기술된 모양의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며 찾아 구하고, 구현하여 살려내어야 하고,
끊임없이 그 모습이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는 역동적 ’생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나와 너의(구별이 없다), 자연의, 생명의 심층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존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이다. 그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다. 본원적 존재인 그는 내 안에 살아 계신다. 내가 신과 만날 수 있는 것, 함께이고 하나일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예수처럼 [내어주는 정도까지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내어주는 정도까지만]’ 나는 그와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되는 것은 골방에서, 교회당에서 주여 주여를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가 아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생명에 대하여 모든 자연에 대하여 나를 [내어주며] 삶을 펼쳐나갈 때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조차도 군더더기일 수 있다. 자연, 다른 생명들, 나, 그리고 신, 이 모두가 함께이며 하나이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나를 물 흐르듯이 조건없이, 의도없이 자연스럽게 내어줄 때에, 비로소 신은 나를 통해 살아계신 것이다. 그것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우리'라는 신의 생명적 현존 구현 방식의 한 결(마디)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속죄, '나'의 구원이란 없다.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고, 그 우리의 삶에 신이 현존하였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이다. '나'를 예수처럼 내어줌으로써 충만한 생명의 삶이 전개되는 '우리' 속의 한 물결, 결로써, '우리'를 통하여 신은 현존하시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시는 것이다. 신의 축복, 사후 심판일의 상과 벌, 천당행, 신의 영광 등은 인간의 지적 미숙으로 인하여 잘못 개념화된 그림일 뿐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우리 안에 신이 현존하는 삶을, 생명의 삶을,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내어줌의 삶, 함께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신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 신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져가게 하는 각종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관점의 왜곡과, 고립된 개개인의 자아중심적 무관심과, 내어줌 없음의 무뇌적(brainless) 사고와 행위의 질곡으로부터 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그를 통해, 참 신으로부터의 나, 우리의 유배의 해방은 물론,
'신'을 유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치열한, 깊은 생각을 수반한, 용기있고, 정직한 믿음만이 우리가 신과 하나일 수 있는 첫 걸음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되는 너-나의 구분이라는 무지, 모자름의 상태를 넘어서서, '너-나-신'이 하나임의 깨달음에서 예수와 같이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내어 줌]의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 게시는 신과 하나됨을 구현, 완성하는 길이다. 그것이 기독인의 참 삶이다.
.........................................

인간이 어떻게 진화, 발달하여 왔는가
인간의 사고 기능이 어떻게 생겨났고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하여 왔는가,
어떤 언어적 말과 글의 개념의 의미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등과
생각이란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표현되는가
인지적 능력과 개인의 동기와 감정, 사회적 집단 압력들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왜곡시키는가
개인의 성격 특성이 어떻게 개인의 생각, 종교적, 정치적 신념에 영향을 주는가
특히 인간의 편견형성과 유지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등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종교적, 문화일반적 각종 신념, 주의, 교리, 제도 등이
얼마나 긴 역사를 통해서 형성, 가다듬음, 수정, 보완, 개혁, 재구성되어 온 상대적인 것이고
계속 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 등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특히 개인의 성격이 개인의 지적 능력의 폭에 의존하며
개인의 지적 특성이
-] 성격특성을 결정하고
-] 이것이 개인의 도덕성, 종교적 신념, 사회적 편견의
편협성/ 고집성/완고성/단선적 사고의 폭을 결정한다는
냉엄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한마디로 줄여서
종교적(사회적도 마찬가지) 신념의 융통성, 경직성 여부는
곧 그 개인의 지적 능력의 폭, 생각하는 힘의 폭을 반영한다는
냉엄한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역사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유명한 신학자들, 신앙심이 깊은 신학자들은
그러한 단선적이고 이분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고
현재도 아니며
끊임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믿는바에 대하여 반문하며
다시 생각하며 , 생각을 재구성하며
믿음을 키워나가고 있음을

참 신앙이란
다른 이가 만들어내어 준
절대적 고정된, 다 만들어진 확정된 그 교리나 그 무엇에 대한
무비판적 one-shot 수용이나 그 이상 더 생각할 바가 없는
그런 수준의 신앙이 아니라

계속된, 끊임없는, 쉼이 없는 찾아 구함
재구성
쌓고, 허물고, 또 쌓기,
"진리에로의 끊이지 않는 quest 의 여정임, 과정임" 을 이해한다면

기독교 신자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반 다원(multi)주의적 단선적 그러한 편협한 종교적 신념을
천명하고 광고하는 것이
곧 자신의 한계적 지적 능력의 폭을 드러내는 것임을
짐작한다면.....

* 우리들 모두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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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개념은 우리가 끊임없이 추정approximation 하여가는 개념입니다.
절대적 참 개념에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않습니다.
그런 한에 있어서 우리가 믿는 신은
참 모습에 대한
approximation에
항상
머물게 됩니다.
사람에 문화에 따라
단지 그 approximation의 정도가 달라질 뿐이겠지요.

그런 한에 있어서
그 approximation이 부족하다고 하여,
또는 아주 형편없다고 하여
또는 방향이 달라졌다고 하여
그 사람의 신을 우리가 approximate 한 (부족한) 개념과 이분법적으로 구별되는
'우상'이라고 부르거나
그 사람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범주화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신 개념도
자기가 세운 범주에서 보면 우상이 아니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50보 100보 차이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평생동안 자신의 뇌신경 세포의 10% 밖에 사용 못한다고 합니다.
참 신의 본질...
내가 세운 관점이 참 본질의 5% 수준에나 도달하였을지요..???
내가 우상숭배라고 이분법적으로 범주화 한 다른 이의 신관은 ... 0.5%,1%...?
한국내의 기성 교회가 선포하고 강요하고 있는 전통적 보수적, 편협한 신관은 3%...?
.......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왜, 남의 믿음의 우상 숭배 여부에 걸려 있는가?'
라는 반문을 받을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오늘 아침 생각에는
기독교나 어떤 종교에서거나
'우상숭배'의 논의가 제기 된다는 것 자체가
참 신관과는 아직도 멀리 있기에 제기되는, 아집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고속도로는
옆에서 보면 골목길과 이분법적으로 차별화되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늘의 비행기에서 보면 오솔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논의를 전개한 사람이
또 다른 깨달음의 문을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이의 우상숭배 논의를 넘어서는 종교, 기독교!
그런 것을 다 포용하는 종교..., 신 관,

그 때에서야 우리가 참 '신의 개념'에 한 발짝 더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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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 신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조차 아닙니다.“

그냥 거기에(우리안에, 자연에) 함께 계십니다.
그냥 계십니다.
태초부터.

인간사에서 지어지는 것은
인간이 짓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이 짓는 바가 신과 합일되게 짓느냐 아니냐 만 있을 뿐입니다." 라고요.

신을 인간사 일상사의 CAUSE(원인)로 돌리려하는(귀인: attribution) 것은
인간의 낮은 지능이 만들어 낸
유치한 시도, 낮은 수준의 이해 시도일 뿐입니다.
신은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수준에서
존재하실 뿐입니다.

인간사의 길흉화복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려는 인간의 생각은
마치 아침에 동이 터오를 때에 어디는 햇볕이 비추고 어디는 그늘지고 한 것이
마치 해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지역, 어떤 산, 어떤 건물 등을 차별화하여서
그늘지게 하거나 햇볕쬐이게 한다는 식의 생각과 같은
인간중심의, 낮은 수준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신은 그냥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햇볕처럼 그냥 존재하며 햇볕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하건,
그것을 그의 신적 의도라고 하건,
그늘지고 햇볕쬐이고 하는 것을 그의 의도적 '하심'이라고 하건
그것은 지적으로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준이 못되는 우리 인간들이
그저 우리의 말로 그렇게 우리자신에게 말하는 수준의 '이야길'일뿐입니다.

'사랑'이라고 우리가 부른다 하여도
그것은
의도적, 방향적, 목적적, 차별적, 보상적, 가변적, temporary,....
의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햇볕같은 '그냥 있음'의 '사랑'이라고 봅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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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의 시점시점에서,
그리고 현재, present, now에서
신이 의도적으로, 목적적으로, 차별적으로 중간중간 개입intervention을 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무엇을 한다는 것은 [시간], [공간], [행위자] [대상] 등의 구성요소를 지닌 구성개념, constructs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원인]과 [결과]를 지니는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의 행위이지요. 과연 신이 이러한 인간적 구성개념의 틀로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갑니다. 이러한 구성개념의 틀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해]의 틀인가 하는 의문도 가고요.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즉 어떤 [agent]가 무언가 행위를 하고, 바로 그 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그에 감사한다든지... 등등의 이유로) 다른 존재들이 그 [agent]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안델센의 동화에 나오는 식의 어린아이 이야기구조의 구성개념 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절대성이 없는 것이고, 인간적 이해 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요.

어떤 [agent]가 [나에게,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었기에]
[나,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한다] ??? ...

얼마나 유치한 설정일까요!!!
안델센의 인어이야기를 읽는 식의 설정이겠지요.

그러나, ...
신은 그런 대상도,
그런 관계 설정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틀은
그러한 틀이 기본인 것 같고,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서는 이해하기도, communicate하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저의 이야기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관련하여
이런 저런 저의 생각의 갈래가 흐르기에,
몇 가지를 어쭙잖은 이야기를 하여 보겠습니다.

신의 '함'은
그 시점의 정지된 시간, 공간 좌표 위에서의 함이 아니라,
지속되는, 펼침의 '함' 이라고 봅니다.

매 시점 새로운 intervention의,
새로운 의도적 추가적, 부가적 '함'이 아니라
태초의 온전한 '함'이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그냥 펼쳐지는 것이겠지요.
인간이 이해하는 식, 개념적 틀로 보아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고 이해가 되겠지요.

그러나 실상 그 '함'은
햇볕이 아무런 중단이나 변화 없이 그저 조용히 번져나가며 모든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고 변화하게 하듯이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그냥 있음의 함' 일뿐이지요.
인간이 이해하는 식의 어떤 특정 지역이나, 민족이나, 개인(예를 들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나 불자)이나, 그룹이나, 상벌을 위해,
심지어는 다른 생물은 배제하고 인간을 위해,
특정 시점에서 새로운 intervention을 수행하는 '함'은 아니겠죠.
그냥 온전한 시초의 '함'이 계속 그대로 진행되는 것일 뿐이겠지요.
- 바로 그러한 '함'의 드러남이 동식물을 비롯한
우리 인간의, 우리의 존재하게 됨과 존재의 지속이겠지요.

-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는 식의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보다는 신은 그러한 대상의 대상이 아닐 것이겠고,
사랑이란 그 '함', 그 '그냥 있음'에 대한 조용한 함께 진동함, 공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신과의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의 사랑의 개념은 실상,
사랑이라는 인식의 개념이 없어진 상태,
대상적 사랑이 아닌 의미에서의 사랑의 개념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나, 나와 너는 하나임,
아니 하나임을 넘어서 그 구별이 없어지는 상태의,
그 무엇이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구별없는 하나이라는 마음,
그저 그런 내 마음을 내어 보내는 지극함뿐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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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사랑의 개념]

첫째로는 '사랑하다'의 문제입니다.
도가나 선가의 도사,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흔히 던지는 말은
'왜 ..그것에 (마음이) 걸렸는가'라는 반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한 문제점의 하나가 기독교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그것도 대상과 내가 객체와 주체로 분리된다는 생각(전제) 위에-
대상으로서의 신에 대한 의도적 의미가 담긴 형태로의 사랑이라는 개념에
'걸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계곡을 내려가던 물이 바위 여울에 갇혀 맴돌 듯이요.

그러한 식의,
대상을 전제한,
지어내 노력하는,
감사의 보상으로 하는,
인간적 개념의 사랑은 신의 사전에 존재하지도 않고,
신은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하여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거나
우리가 그에게 감사의 빚을 갚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흔히 표현하듯이 '그가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의 신이라면
그것은 인간적 존재 수준의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전통적 인간적 개념인 '사랑'이라는 개념을 털어버릴 때에,
우리는 한발 더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참 신성 Gottheit는
유치한 인간개념의 '사랑' 개념을 넘어서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념체라고 봅니다.

따라서
'왜 그를 (종교적 용어에서) 사랑해야 하느냐?' 고 물으신다면,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위에서 말하신 바와 같이
그가 원하지도 않고,
우리가 그렇게(사랑) 한다고 하여서 그에게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가
유치한 인간적 존재에 유사한 존재라면 몰라도요.

둘째로 그러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좋은 예 같지는 않지만요) 갓난아기 때에 엄마를 잃은 손주와 함께 유아 때부터 삶을 같이 하면서 사시는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의 이상적 삶의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손주와 할머니와의 감정적, 생명적 유대의 깊음에 대하여는 우리가 온갖 것을 생각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적어도 '손주를 이처럼 사랑하여 ...을 준다' (Because you are [X] to me, I do that.)식의 [if, then; Because, then] 개념으로 손주를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손주와 자기를 구분하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손주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할머니를 사랑 '해야한다' 식의 개념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냥 그 두 존재가 하나되어 삶일 뿐이지요. 그냥 서로의 존재에 맞는 형태로 자신을 부응해가며 함께 사는 것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함' , '사랑해야함', 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한 '의식적 사랑'의 노력이나 시도 없이,
마음과 행동에서
'그와 하나됨'을 위해
'무의식적'인
'온힘을 다해 마음과 행동을 내어보내는 지극함'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저와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사랑해야함' '사랑 안 함'의 표현과
그런 구별은
인간적 담화 양식 중심의 표현, 부족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여 그를 사랑해야한다' ???
-]
또 다른 동화, 낮은 수준의 인간적 이야기, 내러티브(narrative)일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아이들 동화 수준의
사랑 개념 담화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신을 격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인간과 다른 존재로 격상,
아니 본원적 위치에 되돌려 드리는 절차의 하나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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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과 사랑 개념의 한 덧칠 ]

1. 왜 󰡐아무것도 안 하는 신을 사랑하여야 하는가?'의 물음의
'안 하는'에 대하여 앞의 답변 글에서
이미,󰡐안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속 하고 계시며, 단지, 개개 사건과 개개 존재(식물, 동물, 인간)의 삶에 의도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중간 중간에 새로 개입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갑자기 외부에서 바꾼다는 식의 함󰡑은 하지 않는 것이란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늘진 곳이 있다고 하여 햇볕이 처음부터 이때까지 작용해온 방식을 버리고 갑자기 뒤로(서쪽으로) 건너뛰어 그늘진 곳을 밝히고 다시 동쪽으로 가고 하는 등을 하지 않고, 시간이 가면 자연히 그늘진 곳이 밝아지듯이 그냥 그대로 작용하신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개개인의 일상사, 길흉화복의 변화에 때마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하심󰡑이 아니라,
태초로부터 계속하여 󰡐하심󰡑을 통해 우리의 생명, 삶의 course를 가능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안하심󰡑이 아니라 󰡐하심󰡑이지만
그 󰡐하심󰡑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전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2.2. 󰡐사랑조차 하지 않아야한다󰡑는 저의 표현의 의미:

󰡒...나와 너가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생명에 대하여 모든 자연에 대하여 나를 ‘내어주며’ 삶을 펼쳐나갈 때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조차도 군더더기일 수 있다. 자연, 다른 생명들, 나, 그리고 신, 이 모두가 함께이며 하나이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나를 물 흐르듯이 조건없이, 의도없이 자연스럽게 내어줄 때에, 비로소 신은 나를 통해 살아계신 것이며 그것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이전의 글에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와 [나]의 구별은 없습니다.
[나]가 [우리]고 [우리]가 [나]입니다.

󰡒신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담화는
년전에 제가 올린 Kohlberg의 도덕발달의 인지적 하위 수준을 전제로 하고
전개하는 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위수준에서는 이런 식의 담화를 전개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하나이고 우리이고 또 신이 우리이고 나의 안에, 너의 안에 계신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내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모순입니다.

기성 교회에서 전개하는 우리의 사랑 담화는
너와 나가, 그리고 신이 서로 독립된 다른 객체임을 전제로 한 담화입니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또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아직 너와는 독립되고 분리되고 강한 자아로 남아 있는 나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가, 신이 하나의 물방울로 녹여져 있는 데, 그 부분을 대상화하여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참 신에게로 가지 못한 것이라 봅니다.

다른 말로 하지만
내가 너를, 신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생각, 관념에서 나오는 사랑이란
지어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나인 너, 신에 대한 간절히 하나 되려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에 대상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적 담화라는 것입니다.
󰡐관계󰡑란 분리된 존재 사이의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 수준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야금 산조의 대가 국악인으로 우리에게 감명을 주셨던 김죽파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혼이 줄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어󰡑라고 하셨습니다. 듣는 이에게 잘 보이려고, 잘하려고 해서는 참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돼, 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어, 예수님처럼 사랑하여야 돼...󰡑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강제하거나 몰아가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혼이 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와 너가, 나와 신이 아직 따로 놀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내가 완전히 깨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나를 넘어서서 신과, 자연(다른 사람 포함)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과 나와 너와 다른 자연과의 변별, 분별, 차별화가 없어지고 하나이라는 깊은 절절한 느낌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마음이 나와야 합니다.

다시 길희성 선생님의 책,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에서
(주로. 6장 '초탈과 돌파'에서)
엑카르트의 말을 빌려옵니다.

󰡒신성의 깊이로부터 나온 만물은 어쩔 수 없이 그리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향한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는 우리 영혼에 각인된 신의 모상이 현실화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본성으로 각인된 신의 모상을 회복하고 완성할 수 있는가?󰡓 환원, 초탈, 돌파하여야 한다. 󰡒초탈은 먼저 신과 닮아 동등하게 됨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신이 하나(Einheit)임을 재발견, 재확인하는 행위이다.󰡓 초탈은 󰡒사랑도 겸손도 자비도 아니고 순순한 초탈이다.... 인간이 신과 아무런 차이 없이 신 안의 상(Bild)으로 존재하였던 것과 가장 부합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초탈은 사랑을 넘어선다. 󰡒사랑은 나로 하여금 신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지만 초탈은 신을 강요하여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랑보다 더 높은 덕목이다.󰡓 󰡒아무도 선행이나, 기도로󰡓, 사랑으로(이것은 제가 첨부한 것입니다.) 󰡒이 부동의 신을 움직일 수 없으나, 오직 초탈만이 그를 우리에게 오도록 움직인다... 초탈의 궁극은 인식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지고 빛도 사라진 어둠이다. ..순순한 무이다.... 모든 사물들을 여의고 그 어느 사물들과도 공통성이 없는 영혼의 최고 기능이 신 자신을 그 존재의 넓이와 충만 속에서 지각한다...[왜]라는 [목적]과 [수단]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자기와 세계를 놓아 버림으로써.. 초탈에 도달할 수 있다. [비고 자유롭고 묶임없이](저의 생각을 추가하자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묶임이라고 봅니다.) 되어 신비적 합일 속에서... 초연은 사물을 나의 관심이나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닦달하거나 그 이유나 목적을 따지지 않고 사는 삶의 태도, 사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는 편안한 마음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사랑은 자기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그대가 자기 사랑을 떠나면 그대는 온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기의지의 포기다. ... 먼저 그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놓아 버려랴!]. 내가 나를 위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곳에 신이 나를 위해 원하신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 그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것이며, 그것들은 그와 함께 머물 것이다. ... 초탈은 단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애와 자기 집착의 포기에 그치지 않으며, 자기 의지를 버리고 신을 사랑하고 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철저한 초탈은..신마저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떠날 수 있는 가장 극한적인 것은 신을 위해 신을 떠나는 것이다.“
(저의 생각: 󰡐사랑󰡑이라는 의도적 개념, 행위조차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저 먼저 신과 합일의 상태에 이르러 그에 의하여 자연히 마음이 나오는 것의 한 형태가 사랑이라면 좋지만, 의도적으로 󰡐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든가 󰡐예수처럼 사랑하여야 한다󰡑 󰡐오직 사랑뿐이다.󰡑와 같은 어떤 기독교적 규준(norms)이나 처방(prescription)에 따라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내어놓는 사랑은 아직 낮은 단계라고 봅니다.)
영적 가난이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가 아니다. ... 우리가 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갈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이루려는 의지, 신과 영원을 갈망하는 의지마저도 버리는 것이며, 신마저 떠나 신을 여읜, 그리하여 아예 신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신 은 더 이상 대상적 존재가 아니고, 내가 손을 대고 붙잡을 수 있고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활동하나, 신성(Gottheit)은 활동을 하지 않으며 활동할 것도 없다. 그 안에 일이란 없다. 신성은 한 번도 일을 엿본 적이 없다.... 유(有)로서의 신을 놓아버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무(無)로서의 참 신을 만난다.󰡓
󰡒인간의 행복이 신을 향한 사랑에 있느냐 아니면 인식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에크하르트는 사랑도 아니고 인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영혼의 기능들로서의 사랑이나 인식이 아니라 영혼에 있는 어떤 것- 즉, 영혼의 근저-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사랑과 인식만이 인간에게 참다운 행복을 준다고 한다.󰡓
󰡒신과 인간의 대립적 혹은 상대적 구도를 근본적으로 초월하여야 한다....[신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닌], 인간의 자리, 신과 영혼의 근저... 󰡓인간은 대상적 존재로서의 신, 유로서의 신을 돌파하여 아무것도 아닌 무로서의 신, 신 아닌 신을 만나 신도 나도 해체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 신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저의 첨언: 사랑하거나) 일해서도 안 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위해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신은 저기 있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다고 망상을 한다.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뿌리를 외면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밖에서 무언가를 찾는 타율적 삶...자기 자신을 떠나거나 배반하지 말라...󰡓

신과 내가 합일됨이 탄생하는 과정을 엑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라 다음 여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단계는 심리학자 Kohlberg의 도덕발달 단계 이론의 선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살려는 노력을 하는 단계
2. 신의 가르침과 지혜를 향해 그에 따라 가려고 하는 단계
3. 신과 열정적 사랑으로 결합되어 다른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단계
4. 신과의 결합이 더 강하여져서 다른 어떤 고난, 역경도 즐겨 받는 단계
5. 성령의 은사, 신 안에서, 신의 힘에 실려 󰡐방식 없는 방식󰡑으로 사는
조용한 관조의 단계
6. 피조물의 탈을 벗어나 신과 인간이 완전히 합일된 완전한 무의 단계. 초탈의 극한의 단계

󰡒영원 속의 것이든, 보상이든 행복이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떤 것도 목적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실로 모두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 그대가 설령 신을 목적으로 취한다 해도, 그대가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은 (저의 첨언: 사랑일지라도) 모두 죽은 일이며, 그대는 이로써 선한 일들을 망친다.. 그러므로 그대가 살기 원하고 그대의 일들이 산 일이 되기 원한다면, 그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죽어야 하며 무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것으로부터 무엇을 만드는 일은 피조물들이 하는 것이지만, 신 은 무로부터 무엇을 만드신다. 그러므로 신이 그대 안에 혹은 그대와 더불어 무엇을 만드시고자 한다면 그대는 먼저 무가 되어야만 한다.... 자기 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아무 󰡐이유 없이󰡑 사는 신의 아들은 [그저 산다](저의 강조입니다). 생명이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살듯, 그는 단지 살기 위해 살뿐이다.󰡓

󰡒 그대가 자신의 일을 천국을 위해서나 신 혹은 그대의 영원한 행복(저의 첨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한, 즉 외부로부터 행하는 한, 그대는 정말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좋게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최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로 어떤 사람이 [신을] 화롯가나 외양간 속에서보다, 내적 성찰, 기도, .. 신의 특별한 은총 속에서 (저의 첨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치 신의 머리를 외투로 싸서 걸상 밑에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왜냐하면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신을 찾는 사람은 그 방식을 얻고, 거기에 가려진 신은 놓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방식 없이 찾는 사람은 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
󰡒외부로부터(저의 첨언: 성경에 따른 기독교적 처방 포함) 주어지는 어떤 동기나 목적 없이 사는 삶,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의해 사는 삶, 누군가에게 이유와 까닭을 제시할 필요가 없이 사는 삶은 곧 스스로가 존재 이유이신 신 자신의 삶이다... (사랑이라 할지라도) [이유가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신의 일이나 신을 위한 일이 아니다.](저의 강조입니다.)󰡓
신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는 일, 신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일..등의 종교적 행위 뒤에는 󰡒인간의 뿌리깊은 이기적 욕망과 자기 사랑󰡓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를 비우고 신마저 비운 철저한 자기 부정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인식이란 사랑보다 더 좋다. 왜냐하면 인식은 그 안에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인식은 사랑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인식이 없다면 사랑은 맹목적이다. .. 사랑은 그러나 욕망과 갈망을 일깨운다. 반면에 인식은 [신께] 단 하나의 생각도 덧 덧붙이지 않으며, 오히려 떼어 내고 분리하며 신 앞으로 달려가 그를 벌거벗은 채로 만진다. 그를 오로지 그의 존재에서 파악한다.󰡓

이상의 긴 인용을 통하여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 엑카르트, 심리학자 콜버그 등에 이어져 온 생각에 대한 저의 좁은 소견,
즉 신을 향하는 전 단계에서는 󰡐사랑󰡑을 필요로 할지 모르나,
궁극적 단계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조차 군더더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규범, 목적, 이유에 의하여 마음을 내어 개체로서의 타자나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 사랑이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식적, 의도적, 이유 기반적 사랑을 넘어서서,
신과 나 자신을 포함한 우주만물이 하나가 되는 그런 인식의 궁극적 합일의 체험 속에서 의도없이, 이유없이, 의식없이 자연히 흘러나오는 마음과 행동,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러한 사랑이래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적 의미의 󰡐사랑󰡑이라는 개념, 담화에 매달리거나 걸림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한다, 사랑해야한다, 신을 사랑해야 한다....󰡒의 반복적 되뇌임의 결과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신과 나와 우주만물의 하나됨을 진정 느낌에서 자연히(의도됨 없이) 생명처럼 솟아올라 발산되는 따뜻한 그 무엇의 마음과 행동이라는 의미의 󰡑사랑󰡐 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논의, 언급조차 필요없어지는 그 무엇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라는 차이는 우리 인간들이 그어 놓은 범주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나를 놓아야 합니다, 󰡐나󰡑와 󰡐우리가 차별이, 분별이, 변별이 없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의 한 물방울이 자기가 독자적인 󰡐나󰡑라는 물방울일 수 없고 그냥 󰡐강물󰡑임을 자각한다면, 분별을 없앤다면 나와 신과의 관계는 곧 우리와 신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과연 누구를 타인으로 개념화 하여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 하나󰡑라는 짙은 감정이 있을 뿐이지요.
󰡐나󰡑라는 것이 없는데 과연 󰡐나󰡑와 󰡐신󰡑과의 독자적인 󰡐관계󰡑가 있겠습니까?
나, 너, 우리, 신, 이 모두가 하나임, 하나됨을 느끼는 것 이외에 다른 대상화된 대상에 대한 󰡐관계󰡑와, 그러한 관계 속에서의 사랑이 있겠습니까?
엑카르트가 말한 󰡒인식이 사랑보다 더 좋다󰡓, 즉 인식이 사랑에 우선하며 인식이 사랑을 포함, 포괄한다, 사랑을 넘어선다는 생각은 가장 신의 참 모습에 합일되는 정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로서의 일이나 일로서의 사랑이나 일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그냥 존재함을 통한 함, 그냥 존재함을(나, 너, 신의 구별이 없어진 합일된 존재함을) 통한 부수산물로서의 사랑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사랑을 알려고 함을 통해서 아는 신의 사랑은 곡해일 수 있고,
신의 본질적인 존재의 참 특성에서 나오는 발현의 앎의 이해와 나, 우리와 그가 합일되는 것에 장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그와 합일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에서 얻어지는 초탈의 결과로 자연히 발현되는 참 사랑이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적인 사랑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계적인 인간이 이러한 사랑을 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궁극적인 단계, 즉 아우구스티누스, 엑카르트의 마지막 여섯번째 단계로 이르기 이전에는 그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이전단계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마지막 단계로 갈 수 있는 축복된 성인도 있을 수 있지만요). 그 이전 단계들이 말하자면 언급하신 바와 같은 관계에 바탕한 사랑과 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련의 앞 단계는 나와 타인이, 나와 사물이, 나와 신이 객체로 분리된 󰡐관계󰡑 속에서 대상으로서의 타자(신 포함)에 대한 의식적, 이유-기반적 사랑이 갈구되고 얻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한 점수(불교의 돈오점수의)가 이루어져야 5단계, 6단계의 돈오가 되겠지요.
한계적인 우리 인간은 그 앞 단계들을 너도, 나도 '절대로' 필요로 하지요.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표나 종점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엑카르트의 마지막 여섯번째 단계까지 가야 하겠지요.
사랑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는 단계까지요.
그 단계에서는󰡐관계󰡑가 필요 없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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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글을 올리는 이정모의 실제 삶은? ]

이전 글들에 어쭙잖은 의견을 올리면서 계속 맴돌았던 생각이,
그리고 한 번 의견이 올라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의 하나가
글 하나 하나의 뒤에 숨어 있는 [자신없음]의 이유가
바로 .. 지적하여 주신 그 문제, 그 생각이었습니다.

저의 홈페이지의 첫 화면의 표어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며, '삶'이 곧 '앎'이다."
라는 마투라나의 선언이지만,
그 말이 저 자신에 와서는 표어에 그치고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괴리와 갈등의 느낌때문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 때마다 그 표어를 빗겨가곤 하게 합니다.

저의 글에 대한 질문 화두를 던지실 때마다 답을 하기 힘들어하며
며칠 동안 답하는 것을 피해 다녀야 하였던 까닭의 하나는
바로 지적하신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의 문제였습니다.

위의 긴 글을 올린 후에도 계속 그러한 생각이 맴돌아
저의 말이 공허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말'의 자격이 없어진다는 생각도 하였고요....
....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간, 그리고
현재 그렇게 사는 승려나 현인들도 생각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요

나를 비우고, 나를 내어주고, 나가 없어져야 함을 알지만.....
그것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현실에서, 예전과 같이
주변 삶들에, 생명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고 무심한 채 생존하며
하루 하루를 습관적으로 자신의 안전 위주로
삶을 엮어 나가야 하는 자신, 동물적 습성들

나와 너가 괴리된 채
아직도 '너'에 대하여 최소한의 관심과 서비스로 산 하루인데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듯
온갖 이유로 합리화하는 자신

어떻게 해야 이를 초탈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 정신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행동 활동적으로 구체적으로
나를 비울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를 비우는 것이
바로 행동, 활동적, 물질적으로 나를 비울 수 있는 수준으로 갈 수 있는 것일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일까,

인간의 안전의 욕구라는 것이 무엇일까,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성취욕구란 왜, 무엇일까
아무 복잡한 생각없이도 쉽게 자신을 비우는,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리 될 수 있을까....
습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습관화된 안전에의 욕구는 어떠한 진화 원리에 의하여 우리에게 인이 박혔을까?

나와 너의 구별을 없애고, 나를 비우고, '우리'로써 하나됨으로써 사랑하고,
아니 사랑조차도 넘어서야 함을 알지만
그것은 생각일뿐이지 '함'이 아닌 상태에서 맴돌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자신을 넘어서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

답답하기만 합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나를 비우지 못하고, 나가 너와 괴리되어 있는 저는
어떻게 하여야
어떻게 나를 넘어설지
구체적 실천 방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앎'이, '함'이 못되고, '삶'이 못되고 있는 상태이지요.
괴리된 상태이지요
.......

한 참 후에

그져 스쳐 지나가는 유치한 생각의 하나는
'젖은 손'의 생각입니다.

물기 하나 적시지 않고는 일을 시작하기도 싫고
더 힘든, 큰일은 엄두도 못내는 것 같습니다.

조그만 물기라도 손을 적시는 일을
일단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엄두도 내고, 점점 더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작은 일에 손을 적시는 일
작은 일에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비우고 다른이들과 하나됨을 체험하는 일,
그러다 보면 점점 더 힘든 일에 더 자주, 오래, 많이, 손을 적시게 되겠지요.

한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직장, 가족, 친구, 즐겨 하는 일, 물질도 버리고 무소유로 돌아갈 수 없는
평범인으로서의 우리로써는

우선 당장은
하루하루 손을 더 적시어 가며,
매일 그 정도가 깊어져가도록, 더 궂은 일을 하도록
자의식하며 기도하며
힘써 노력하는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언젠가 '자유함'의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서요.

큰 용기가 없고
그저 보잘 것 없는 우리들로서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더 젖은 손으로
다른 이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 나를 더 내어준 오늘로
자신을 달래며
내일을 기약하여야 하겠지요.

하지만 종국의 그 자유함에의
너와 나가 하나됨에의
신과 하나됨에의 그날에의 길을 가고 있음은 잊지 않은 채,
놓치지 않은 채요.

- 영적 깊이와 실천이라는 것이 체화되지 않은 채
아직도 하나의 추상적 개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초보적 이야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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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2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신
구상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싯귀를 다시 읽으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나름대로 생각을 흘립니다

그분은 영원을 이야기하시고 계시지만
그 영원은
불교나 기독교에서 신자들이 상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후세계라는 개념,
그러한 좁은 틀에서의 영원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과

평소에 생각하였던 바,
'사후세계'에 대한 전제나 논의가 없는
'참' 종교란 불가능한가의 물음을 다시 던져봅니다.

종교에서의 사후세계의 전제나 논의는,
죽음, 윤회, resurrection의 거론은
담화수준(Levels of Discourse)에서 낮은 수준이며
극복되어야 할 수준의 담화라고 생각됩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삶의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죽음이 없기에
윤회나 resurrection을 거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Another Level of Discourse !
'참' 종교가 추구하여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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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계하신 시인 구상님을 그리며 그분 시를 둘 인용합니다.

「오늘」

- 구상 -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 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꽃자리」

- 구상 -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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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8] 다시 저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구원!

그것은 나 자신이 참 신과 하나됨을 이루어 가는 진행형의 과정 그 자체이며,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매일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닦으며 딛고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체험적 자각
그것이상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달함'이라는 결과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함께의 우리].

지금까지는 (기존의 기독교의 일반적 관점)
마치 구원에서도 너와 내가 구분되어서 각자가 그 구원의 과정을 가는 것처럼
이야기하였는데,
나와 너의 하나됨이 전제가 되어야겠지요.

나와 너의 하나됨이 없이는 나와 신의 하나됨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은 저 밖에 하늘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며,
내가 곧 신의 지체이며, 생각이며, 느낌이며,
나의 행동이 곧 신의 움직임이기에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인,
너가 바로 신의 지체이며 생각이며 움직임이기에
너와, 나, 신 이 셋이 하나임을,
신과의 하나됨이
너와, 우리가 하나됨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너와 나가 하나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고
그 하나됨을 향해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과정으로서의 구원이겠지요.

물론 그 '너'에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와 다른 동물을 포함한 자연도 포함시켜야 하겠지요.

전통적 기독교에서 이야기해온 그런 식의 원죄나,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negative)는 없으며
오직 그 너와 나가, 그리고 그를 통해 참 신과 나, 신과 우리가
하나됨에 '도달하지 못함', '미치지 못함(lacking)'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이 미치지 못함을 채워 이루려고 애쓰는 간절함
그 간절함을 체험적으로 계속 느끼고 살아 나아가는 그 기쁨
그 기쁨을 조금씩 더 맛보며 나아가고 있음 (진행형)

이것이 바로
'구원받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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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산에도, 물에도 어디에도 사탄도, 악도, 악한 권세도 없습니다.

인간은 산과 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악, 사탄, 악한 권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를 깨달아 알지 못하고 부적응 하는
psychologically disoriented, 가여운 군상들
무리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에 대하여 그저 우리가 naming하는 몸짓일 뿐입니다.

그들에 대한 왜곡된 근시안적인 우리의 해석일 뿐입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조차도
인지적 본원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자연은 폭풍이 불건, 따사한 잔잔한 봄날의 바다이건
그냥 있을 뿐입니다.

인간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냥 그런 상황일 뿐입니다.

해석없이, naming 없이
또 폭풍이 부는군
하고
수용하는 반응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폭풍은 악이 아닙니다.
폭풍은 악의 권세가 아닙니다.

'폭풍'조차도 인간의 naming입니다.
폭풍은 '폭풍'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저의 스쳐가는 생각입니다.
아주 틀린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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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감옥] 2005-01-30

http://faculty.virginia.edu/consciousness/

[Stanley Sobottka]의 의식의 대화 중에서 개념의 감옥이라는 표현 사용함
- 자세한 것은 링크 내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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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3-20

[미래의 신의 개념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나?: 신과의 독대,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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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니 어제 저녁, 학생들의 모임에 갔다가, 한 졸업생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사 받았습니다. 집에 오는 전철 속에서 첫 장을 읽던 저는 흥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에 대하여 지난 해 동안에 나름대로 생각하여 오던 개념들이, 그리고 최근에 주변의 분들에게 이야기하던 그 개념의 생각들이 그대로 이미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던 책에 그대로 공명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요.
흥분을 삭이며 처음 몇 장까지 읽고는 그 책에 관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섭렵하였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었을가 하여 찾아보니 이전 시리즈는 번역되어 있는데
이 2004년판은 번역이 아직 안된 것 같습니다.
{시중 서점에 있는 번역된 책인 ‘신과 나눈 이야기 [Conversations with God]’, ‘신과 나누는 우정’, ‘신과 나눈 교감’ 이 아니라 같은 저자의 2004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입니다}
곧 번역본이 나오겠지요. 언젠가 번역본이 나오면 꼭 사보시기를 권합니다.
관심을 지닌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1, 2, 3장의 일부 문구와, 웹섭렵 자료의 일부를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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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Tomorrow's God: Our Greatest Spiritual Challenge
저자: Neale Donald Walsch 출판사: Atria Books; (2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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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에 대해 언급한 어떤 기사
- 저작권 문제 가능성으로 생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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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문단 발췌]

신: 나의 기능은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야. 내 기능은 창조하는 데에 있는 것이야
인간: 당신이 창조한 이후에,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건 괘념(care)않는다는 말씀이세요?
신: 나는 너희가 괘념하는(신경쓰는) 만큼만 신경쓰는 것이야.
인간: 그래선 안돼요! 당신은 care하시지요. 만일 당신이 우리가 배려하는(신경쓰는) 만큼만 신경쓰신다면, 그렇다고 당신이 세상이 망하게 내버려두시지는 않겠지요?
신: ... 내가 너희들만큼만 배려하는 것이니까, 세상은 망할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인간: 아니, 왜, 왜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까?
신: 왜냐하면 너희들이 안 하니까.
인간: 우린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신이니까. 당신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실 수 있어요.
신:.. 할 수 있지, 그리고 너희들도.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너희들이 하지 않는다면.
인간: 왜요? 도대체 당신은 어떤 신이 길래...?
신: 최선의 존재이지, 유일한 존재이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준 존재이지, 그리고 그것을 결코, 절대로, 결코 간섭하지 않을 존재이지
인간: 인간을 인간에게서 구하는 것 조차도요?
신: 내가 너희를 너희 인간으로부터 구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들은 인간들(yourselves)이 아니지. 나의 종일 뿐이지....

...
인간: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인류에게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당신 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라 말하여주시면 그 것을 우리가 하지요. ... 이것이 인류의 거룩한 신념이지요.
신: 그러한 신념은 오류야. 그건 신의 할 일이 아니야, 그건 신의 목적도 아니야, 그리고 그건 신의 기능도 아니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상당히 많은 너희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신의 일, 신의 목적일 뿐이지 참 실재하는 신의 특성은 아니야. 그런 것은 과거의 신의 기능이지 내일(미래)의 신의 기능은 아니야.

저자는 책에서
[신에 대한우리의 그릇된 신념 오류]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
3. 신이 원하시는 것을 행치 않기에 신은 우리를 신으로부터 격리시켰다.
4. 신은 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하기를 심히 원하신다.
5. 그 요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신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21세기 내일(미래)의 새로운 개념의 신은

1. Tomorrow's God does not require anyone to believe in God.
(현재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이야기이지요)
7. Tomorrow's God is needless.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 것도 없고, 원하시지도 않고)
8. Tomorrow's God does not ask to be served, but is the Servant of all of Life.
9. Tomorrow's God will be unconditionally loving, nonjudgmental, noncondemning, and nonpunishing.”

또, [이하는 번안]
신: 너희가 Life를 믿으면, 신을 믿는 것이다. 많은 말로 하건 안하건 간에.
너희가 무신론자일 수도 있고, 불가지론자일 수도 있고, 그 사이의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무엇이건 신에게는 문제가 되지(matter) 않는다.
.. 너희가 나를 여호와라고 하기도 하고 알라라고하기도 하고, 브라만이라고도 하지만... 신의 다른 이름이 있다.
인간: 그 이름이 'Life" 인가요?
신: 그렇다.... 너희들 중의 어떤이들은 신이 Life 가 아니며, 그것의 밖에 있으며
그것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지만 Life와 God이라는 말은 서로대치 가능하다.... 그렇다면, Life가 어떻게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믿는다고 너희를 벌을/상을 주겠는가? Life는 과정이다. 즉 신은 과정이다 Life is a process and God is a process.
인간: 신이 과정이라니, 무슨 과정?
신: 삶(생명)의 과정...미래에는 신이 유일자적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Life라 하는 비상한 과정인 것이다.

... 24장에서
The fastes way for anyone to experience that they are enlightened ... is
to cause another to know that THEY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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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웹 자료 ]

저자 N. D. Walsh와의 인터뷰: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향하여.
http://www.beliefnet.com/story/146/story_14643_1.html (1쪽)
http://www.beliefnet.com/story/146/story_14643_2.html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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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일부 발췌
신과의 대화 (굵은 글씨가 신의 답변):
어제의 (이전의) 신 개념에게 '굿바이' 하기
http://www.beliefnet.com/story/146/story_14648_1.html (1페이지)
http://www.beliefnet.com/story/146/story_14648_2.html (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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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을 만나시오.
http://www.cnn.com/2004/SHOWBIZ/books/06/14/tomorrows.god/
-] No new definition of God will be 'ruinous for religion,' but clinging to a dead definition will be." says the Right Rev. John Shelby Spong, the retired Episcopal Bishop of Newark, New Jer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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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깨달음enlightenment의 길 : (부분 발췌)
http://www.cygnus-books.co.uk/features/tomorrows_god_neale_donald_wals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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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음]

책의 홍보 글
http://www.truthbook.com/amazon/Tomorrows_God_Our_Greatest_Spiritual_Challeng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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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Unitarian Universalist Association 설교 글:
'왜 새로운 (코페르니크스적 변화의) 신 개념이 형성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신개념의 요체는?
http://www.unitarian.co.za/0302_ct_serm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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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morow's God - Impactful Quotes from this Powerful book
새로운 참 신은 어떤 신인가?
http://www.tperkins.com/spiritual/tomorrows_God.htm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글 단락들을 차례로 모두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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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 중:

사탄은 저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SATAN (Seeing Any Thing As Negative) 경향성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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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미래)의 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 LLoyd Geering 안내
작성일 2005-03-20

Spong 감독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와 비슷한 신학적인 일을 하고 있는 분이 뉴질랜드에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오래 전에 교회의 다른 분들에게서 듣고도 제가 게을러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국내 신학하시는 분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저 같은 평신도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 자료 Neale Donald Walsch의 책 소개 자료를 올리면서 관련 자료를 섭렵하다가 찾아진 아래 자료에 눈이 떠지면서 다른 분들과 나누기 위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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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미래)의 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이라는 제목으로
미래의 신에 대하여 Neale Donald Walsch의 2004년 책보다 먼저 진보적 신관을
Walsh와는 그러나 조금 다른 형식으로 개진한 로이드 기어링 목사/교수의 책
(2000년) 사이트
http://www.westarinstitute.org/Polebridge/Title/TomorrowsGod/tomorrowsgo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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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 World to Come 사이트
http://www.westarinstitute.org/Polebridge/Title/World_to_Come/world_to_come.html

World to Come: From Christian Past to Global Future
Lloyd Geering
- 내용 요약 생략 -
[저자의 약력]: 이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 끝에 Presbyterian Church of New Zealand
의 고발이 잘못이고 Geering이 오류가 없음이 확인됨 등 의 이야기
http://www.westarinstitute.org/Fellows/Geering/geering.html
http://www.bookcouncil.org.nz/writers/geeringlloyd.html

[Geering의 공헌에 대한 커멘트]
http://www.investigatemagazine.com/_IDdisc2/000001d9.htm
[위의 사이트 내용 + 저의 생각]: 이런 고난을 당하여 가면서도 그의 신앙, 그가 믿는 바를 지키고, 그의 양심에 정직하기 위하여 80대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많은 국내외 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믿고 있는 바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비겁한 겁쟁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그들의 가능성 범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다.

-책 내용 발췌-
http://www.westarinstitute.org/Polebridge/Title/World_to_Come/World_Excerpt/world_excerpt.html
위 사이트에서 끝에서 두 번째 단락부터 보세요

[위 책에 대한 Spong 감독의 커멘트]
- 생략 -

[Geering 교수/목사의 다른 책에 대한 25세의 한 흑인여성의 커멘트]
http://www.stmatthews.org.nz/R01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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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 final cause의 제거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
작성일 2005-09-19

[목적인의 제거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 17세기의 유럽 합리론의 세 거장의 한 사람이었던 Baruch Spinoza에 관한 글에서 인용합니다. 그에 대하여 신학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어 왔는가에 대하여는 제가 무지한 채 인용하는 것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괄호) 안의 단어들은 제가 사족을 달은 것입니다.

- final cause의 제거 -

신의 완전성을 드러낸다든지 아니면 선을 더욱 널리 확산시키려는 등의 목적을 위하여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말에..., 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신이라는 언급(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사물들의 본성의 질서는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며 이것 이외의 어떤 다른 질서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기로 ‘선택’ 하였다든가 신의 세계의 창조에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는 식의 언급은 부당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에서 예를 들면 지진이나 질병과 같은 것을... 이는 신이 화를 내거나 불쾌함으로 해서 생긴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불편함을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건하고 선한 사람들까지도 겪는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 자연 안에 목적인(final cause)이 존재한다는 (무언가 신의 인격적 의지, 의도, 목적에 의하여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신념이, 자연적 사건의 진정한 원인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목적인‘이 존재한다는 (우리들 인간의 잘못된) 신념은 단지 무지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념의 근원을 제대로 추적하기만 하면 ’자연은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목적인은 단지 인간이 꾸며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이‘ 명백히 밝혀질 것이다.
사실 목적인을 주장하는 모든 이론은 참된 인과성의 개념을 왜곡시키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신 = 자연)으로부터 생겨난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상과 악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반박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완전성’과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만 그러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신의 어떤 의도적 목적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거나)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는 그냥 신의 본질, 표현일 뿐이다. 우주만물의) 양태들의 체계인 소산적 자연은 필연적으로 신 또는 무한 실체인 능산적 자연으로부터 생겨난다. 이 과정은 어떤 목적인(final cause)도 지니지 않는다.

-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
인간이 신을 인식할수록 그는 훨씬 더 신을 사랑한다. .. (인간을 포함하여) 사물들을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필연성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정신의 쾌 또는 만족이 생겨난다. 그리고 영원한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한 쾌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이러한 지적인 사랑은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에서 고찰된 인간 정신의 본질을 통해서 신이 표현될 수 있는 한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 그 자체이다. 사실상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인 사랑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어떤 신비적인 의미나 인격적 존재에 대한 사랑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은 개인들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완벽하게 설명한 과학자가 느끼는 것과 같은 쾌 또는 정신적 만족감과 더욱 유사할 수 있다. ..‘신과 자연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 .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노력할 수 없다.’

(강조하기 위하여 제가 다시 말을 바꾸어 반복합니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인간인 당신)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신, 자연의 존재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의 미망 속의 헛된 노력이다. 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신의 축복을 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냥 자연, 신의 섭리와 하나되어 (기쁨과 행복이건 슬픔과 고통이건 간에)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함, 그뿐일 뿐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끝으로 인용합니다.)
신이 (인간인 나, 당신)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 사랑하는 신이, 신이 (강조합니다)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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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4

[말이 없는 신, 인간의 말을 넘어서는 신]

-기도-
(우리가 우리 멋대로) 당신을 읊고, .. 당신의 속성이 아닌 상징들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자신의 조용하지 못한 생각이 만들어낸 말을 지껄이는 모든 기도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언제나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 ...

만약 당신이 우리들의 말을 당신의 말로 받아들이신다면,
모든 사람들은 귀먹은 우상에게, 들리지 않은 채, 소리치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오 주여(?),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소서.
주여(?), 당신의 크나큰 무언의 말로써 우리의 절름발이 은유를 해석하소서

-C. 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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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인격적 이미지, 우리에게 편안한 이미지, 다른 피조물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이미지, 특별한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의 이미지, 개념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신의 궁극적인 실재성을 축소시키고, 그의 신성을 자그마한 ‘귀먹은 우상’으로 떨어뜨리는 격이 될 것이다.

- 앤드류 뉴버그 외 지음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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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신의 본질적 존재 양태는 " 그냥 있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내가 어떤 삶을 엮어나가건, 내가 죽건,
신은 "그냥 있음" 입니다. "

“나" 안에, "우리" 안에 (우리는 식물 동물을 포함하는 우리입니다),
자연에 그냥 있음입니다.

인간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인간의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인간의 말을 들지도 않는,

그리고
인간의 말을 듣고는
태초의 긍극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등의
어떤
의도가 없는,
의도라는 것을 넘어선
그냥 있음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그냥 있음에 의해
이 세상이 존재-변화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그와 함께함의 최선의 존재 양식은
내 안에,
우리 안에
그가 말없이 존재함을,
어떤 커다란 힘으로,
원리로,
존재함을
말없이 느끼고
항상 함께 사는 삶입니다.

나와 식물들을 포함하는 우리가 그의 표현 양식이며 그 자체임을 느끼면서...
그냥 삶입니다.
그냥 있음입니다.

의도적으로 편향된 신념으로 무엇을 짓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느끼며 그에 부응해가는
조용한, 말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으며
그와 나,
우리는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의 존재 양식이라고 봅니다.

(* 위에서 편의상, '그', '바라는' 등의 인간적 의미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한 것은 양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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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는 존재한다, 고로 회의한다] ..는 기사
작성일 2007-02-10

자신이 생각하는 과학관만이 옳다고 믿는 젊은 과학자나
자신의 관점이 옳고 일반 국민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이나
전통기독교만이 진리의 길이며 다른 종교는 사교라고 믿는 근본주의 신앙가들이나
진보(보수}의 주장, 생각은 틀렸고 보수(진보)의 주장, 생각은 옳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믿음이 참이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러한 확신, 믿음은 독일 수 있다.
상대방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

그러한 확신, 신념, 신앙, 믿음에 대하여
끊임없는 반문, 의심, 회의를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다.
특히 내가 그러한 확신에 빠져있을 때에... (이러한 글을 쓰는 저 자신을 포함하여)

아래에 보스톤글로브 지에 실린 글이
이러한 우리의 편향, 집착의 위험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Meanwhile: I am, therefore I doubt
John Patrick Shanley The Boston GlobePublished: February 8, 2007

http://www.iht.com/articles/2007/02/08/opinion/edshanley.php
-본문 생략; 사이트 참조 -.
..
그런데...
내 생각, 내 신념, 내 믿음만이 참이라는 진창에,
수렁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내가 나에 대하여 자신할 수 있을까?
I doubt 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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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의 고뇌에 찬 회의의 날들이 주는 감동
2007-08-30 일자 자료


지난 9월의 어느 날 우편으로 배달된 타임지의 표지 기사는 '마더 테레사의 비밀스런 삶' 이었다. 지면 할애에 인색한 Times 지가 무려 8쪽에 달하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 내용이 궁금하여 다른 기사를 읽기 전에 이 기사를 먼저 읽어 보았다. 기사를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오갔고 감동에 싸인 펜을 찾아 줄을 치며 끝까지 읽어 나갔다.
그리곤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던 새길교회 토론 방에 글을 올릴 용기를 내었다. 이 토론방에 글을 올리지 못했던 나 나름대로의 이유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그동안 글을 못 올리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이 테레사 수녀에 대한 기사에서 얻는 감동이 주는 것 같았다.
되생각하면 거의 40 년 전에 나는 당시에 살아계시던 어머님에게 회한스런 짓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시던 어머님께 나의 어쭙지않은 회의론과 전통적 기독교적 관점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말씀드렸었던 것이다. 어머님은 그 가능성을 한번은 생각하여 보아야겠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님은 얼마 후에 척추수술을 위하여 입원하셨다가 마취 사고로 그냥 돌아가셨다. 갓 쉰의 한창 나이이셨다. 내가 제대한 후 대학원 1학년의 눈오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내내,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할 때면, "왜 교회를 위하여 그렇게 온 시간을 내어서 일하시던 한창 때의 어머님을 데려가셨는가" 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문과, 독실한 신자인 어머님께 잠시라도 회의적 생각의 실마리를 제시하여 드렸다는 불효자라는 자괴감이 함께 떠오르곤 하였다
두 번째 생각과 관련하여 혼자 생각하기를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회의를 던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아야지 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먹음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이따금 나의 얄팍한 생각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의 믿음에 회의의 씨앗을 뿌리는,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행동을 이따금 해왔다. 교회 홈페이지나 다른 주변인들과의 만남에서.
그러나 어느 땐가부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되었다. 아주 이름난 독실한 기독교인이나 자신의 손주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마을 입구 성황당 나무에 진심으로 기도하는 기독교를 모르는 어느 할머니의 믿음이거나 그 나름대로 존중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종류의, 형식의 믿음이건 그 믿음은 그 개인의 삶 전체를 반영하는 무엇이고
그런 체험, 삶을 살지 못한 제3자가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무어라고 이야기 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다른 것을 믿는다고 하여, 자신과 다른 신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하여,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믿는다고 하여, 자신과 다른 깊이의 열성과 믿음으로 믿는다고 하여, 나의 관점이 맞으니 내 식으로 생각하거나 믿어야 한다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강요하는 것의 어리석음이 느껴지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정도 있었지만, 한동안 침묵하게 되었다. 신앙과 관련하여 주변과 이야기도, 웹에 글도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갈등, 내적으로는 회의적인 생각, 나름대로의 신관, 종교관을 계속 지니고 생각하면서도, 외적으로는 그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양식을 존중하여 주고, 함께 있을 때에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 두 흐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해결이 안 된채 나를 계속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러한 무게가 나를 한동안 입을 다물고 멈추게 하여 왔던 것 같다.
그런데 !!! 이번 타임 기사를 읽으면서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감동을 받았다.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 신앙으로 수많은 버려진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성인으로서 추대되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일상적으로, 외적으로는 그러한 신앙의, 헌신의, 사랑의 삶을 살았지만 내적으로는 몇 십년간 깊은 회의의, 고뇌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깊은 내면적, 신앙적 갈등과 고뇌를 일반인들에게는 말을 안 하고, 신앙에 바탕을 둔 매일의 헌신적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도 아주 가까운 몇 몇의 고회성사 신부들에게 편지로, 말로 진솔한 속내 마음을 고백하여 왔다고 한다.
작고하기 전에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그의 편지들을 모두 파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가톨릭 교단은 이 편지들을 파기 안하고 모아서 책으로 출판하기로 한 것 같다. 이 책은 곧 "Mother Theresa: Come be my light" 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가톨릭 교단은 이 책의 내용이, 낮은 수준의 무신론자들이나 회의론자들에게는 무신론적인 비기독교적인 증거로 인용될 수도 있지만, 실제는 이 책의 내용은 오히려 더 깊은 수준에서 참 신앙의 삶,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테레사 수녀의 고뇌의 기사를 읽으며 감동과 함께 다음과 같은 여러 생각이 오갔다. 테레사 수녀는 생각하는 믿음, 정직한 믿음, 생명의 기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믿음의 본을 보여준 것 같다. 국내 기독교의 일부 신도나 목회자들이 지니고 있는 조금 성숙되지 못한 수준에서의 단정적 확신적 신앙이 아닌, 생각하는 믿음, 성숙된 믿음의 본을 보여준 것 같았다.
매일, 매시간 벌어지는 신의 피조물들의 생명의 사라짐, 들고 남, 그 신체적 고통의 상황을
직접 함께 아파하며 살아온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렬한 깊은, 본질적 회의를 테레사 수녀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으로 마주치는 처절한 삶, 고통, 죽음의 현장들을 함께 느끼면서 정직한,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그녀와 같은 깊은 회의적 고뇌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테레사 수녀는 외적으로 일상에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헌신의 본보기로 살아 온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의 보도된 테레사 수녀의 사진들에서 느끼던 그 그늘이, 비참한 생명 상황들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 그늘이었다고 생각하였었는데, 이제 보면 그러한 그늘에
그가 믿던 신의 부재에 대한 회의적 고뇌의 끊이지 않음에서 오는 그늘이 합하여져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그 진한 고뇌가 전하여져 오는 것 같다.
테레사 수녀가 계속 느꼈을 계속된 신의 부재, 그의 무반응, 그의 사랑이 들어나지 않음
커다란 텅빔, 공허, 암흑, 차가움, 그러한 것을 느낌에서 오는 칼날같이 도려오는 진한 신앙적 고통, 고뇌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속내에 감추고, 미소를 계속 보여야하는 주어진 삶의 현실. 그런 암흑, 텅비임, 냉냉함을 매일 매일 느끼며, 그런 아픈 진한 고뇌와 회의를 가지고도 그럼에도 살아있는 그 누구보다도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봉헌한 테레사 수녀. 신의 부재를 실감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봉헌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으로 이끌어간 그의 자세가 정말 놀랍다.
초년병 신자가 생각않고 단정적으로 믿어 버리는 그런 단순하고도 편한 신앙을 지닌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면서도 참 사랑의 본을 보여준 그가 '성인'의 반열에 추대된 것이 참 옳은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테레사 수녀가 일반인 일반신도들과 다른 점은 다음에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신의 부재, 텅빔, 깊은 암흑감들에서 그러한 것이 바로 신의, 그리스도의 본질적 속성임으로 깨달아 알고 그러한 부재, 암흑, 텅비임에 대한 절절한 느낌에서 오히려 신과 깊이 연결되고 그와 하나의 삶임을 체험한 것 같다. 물론 생각하는 믿음을 지닌 테레사 수녀는 그 이후에도 이러한 느낌도 계속 반문과 회의를 하였겠지만.
카톨릭 교단은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이 책으로 공개됨을 통하여,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목회(ministry)와 전혀 다른 목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국내외에서의 전통적 신앙관, 목회관은 아마도 기독교적 믿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아니면 최소한 점진적으로) 확신을 지니고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는 방향으로 하는 목회인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틀의 목회는 테레사 수녀의 진솔한 끊임없는 회의와 고뇌에 찬 믿음의 길의 목회, 그러면서도 기독교적 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깊은, 진솔한 회의를 통하여 신의 참 모습에게로 더 가까이 닥아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제시, 추천하는 목회인 것 같다.
신의 부재, 무반응, 그로 인한 텅비임과 암흑을 매일 매일, 매순간 절실히 느끼면서도 그 대답없는 신에게의 연결 끈을 놓지 않고 자신의 흔들리는, 회의와 고뇌에 찬 신앙의 깊이와 질을 오히려 더 상승시켜나가는 그러한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신앙의 길이다. 신과 나와 삶과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체험적 인식의 길인 것 같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아니 신을 믿는다는 것은 많은 종교적 틀 중에서 실존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기독교적 틀을 확신적으로 믿고, 절대 회의하지 않는 그러한 길을 가는 방식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분들이 더 축복받은 분들이다), 테레사 수녀처럼 대답이 없는 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의하며 고뇌하지만, 그 부재, 텅비임, 냉냉함, 어두움 속에서 오히려 나 자신과 신 사이가 한 수준 높이 연결됨을 긴장 속에서 깨달으며, 일상적으로는, 나에게 던져진 현실적 종교적 신앙의 틀을 지키며, 그 안에서 능동적, 적극적 행동으로 나, 신, 생명, 우주가 하나임을 느낌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나눔의, 넓은 의미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간 길을 따라서!
이러한 긴장을, 갈등을 내적으로 지녔으면서도, 묵묵히 말씀증거를 하거나, 교회 일에 봉사하는, 아니면 이러한 회의와 고뇌로 한동안 교회에서 멀어져 있는 말없는 우리 형제자매님들에게, 그저 "함께!" 라는 따뜻한 마음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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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는 바, 믿는 방식이 서로 다름은 좋은 것임]

2009.08.02 이정모

[1. 머리말]

그동안의 여러 가지 교회 밖의 정치사회 상황들에서
그리고 교회 내의 여러 상황과 교회 웹에 올려지는 글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을 자주 마주쳐야 하였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나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만이 옳다는 주장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각이, 믿는 바가, 믿는 방식이, 행동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일방적인 불신의 표현들이

말 하는 사람의
성숙된 인격에 의하여, 성숙된 믿음에 의하여
가다듬어지거나 여과되지 않은 채,
공개적으로 강하게 표출되어

상대방 사람들이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바,
믿는 바, 믿는 방식의
좋음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 일들이다

이따금 이런 행동은
상대방의 인격, 감정을 심하게 건드리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저 자신도
그러한 상대방의 믿는바, 믿는 방식, 생각하는 바를
흔들어 놓는 좋지 않은 일을
과거에 많이 하였고
지금의 이 글도 그런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글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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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야기1]

이미 지난 3월 8일에 올렸던 글에서 언급한 바처럼
저는 지난 40 여년을 인간의 지적 능력인 인지에 대하여 연구하여 왔습니다.
인간의 주의, 언어, 사고, 감정들이 일어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탐구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탐구 결과로 얻어진 결론은
인간은 비합리적, 탈이성적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화과정에서 발달된 인간의 적응 메커니즘입니다)

아무리 감정의 개입을 배제하려 해도
나의 모든 생각, 지식, 믿는 바, 믿는 방식,
그러한 생각, 믿음을 표출하는 행동,
그리고 상대방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여 옳지 못한 사람들로 묶어 버리는
나의 단정적 판단과 그의 실천적 행동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특정 편향된 감정, 정서들이
저 아래 저변에 단단히,
그리고 늘
깔려 있다는
그렇기에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바,
우리가 옳다고 행하는 바, 믿는 방식은
절대적인 참이, 옳음이 아닐 수 있다는

즉, 내가
나의 확신에 찬 생각이
(아무리 최근의 학문적 지식을 동원, 연결하여 추론한 것이라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다른 이의 믿음, 믿는 바, 믿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지금의 저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인데 행동하는
지금의 이글의 저의 말도 그런 부류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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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야기 2]

제가 정치사회 일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넘어서
종교, 믿음의 내용과 믿음을 행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기까지에는
저 나름대로의 많은 경험, 방황, 회의, 생각의 가다듬음을 거쳐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한다면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저의 할아버님은 이미 1910년대에 전도사로서 교회도 세우시고, 전도를 하셨던 분이고
저의 아버님은 목사가 아닌 장로의 신분으로
교회의 지방회의 위촉을 받아 교회를 네 곳이나 개척하신 분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시절에 아버님을 따라서 가서 교인들의 집 안 방에서, 마루에서
작은 규모로 예배보았던 그 모임들이 커다란 건물의 교회로 발전하여 있음을 보고는
감회에 젖곤 합니다.

교회의 중등부 학생회 회장까지 지낸 저는
고등부 때부터 회의하고 방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의론자, 불가지론자, 불신자, 그저 조금만 믿는 자, 회개한자 등의 범주를 오락가락하기
몇 십 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년은퇴를 한달 앞둔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동안 이 교회에 와서, 특히 일요 신학강좌를 들으면서
저의 신앙, 아니 믿는 바, 믿는 방식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가다듬어지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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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야기 3]

저의 믿는 바, 믿는 방식을 비교적 성숙하게 하고 안정적이 되게 한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 모임이 있습니다.

김용준 교수님이 시작하신 ‘과학과 종교’ 독회 모임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어서
신학, 종교, 철학, 종교 관련 과학 일반에 대한
외서, 국내 도서들을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이모임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그러면서도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신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 인문사회과학자, 공학자,
저술가, 과학 관련 기관에 종사하는 분 등이 참여합니다.

배경이 개신교, 성공회, 카톨릭, 불교의 분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가 없는 완전 불신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태신앙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이 모임에서는 국내 교계에서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할
주제, 생각, 신념, 종교적 방식들에 대하여 자유롭게 토론 합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젊은 신학자, 종교학자들은
자연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교수)처럼
자주 해외의, 국내의 종교-신학-과학 관련 학회에 참석하며, 논문도 발표하며
최신의 종교, 신학 논의 주제들에 대한 최근 관점들, 생각들을
갖고 와서 소개하기도 합니다.

국내 보수주의 전통의 교단의 목사님들이 주장하시는
것들의 많은 것들이 이미 많은 해외의 신학자, 종교학자들에 의해
버려지고, 거론조차 되지 않는 낡은 생각, 관점인 것이 많음이
이 모임에 참여하는 신학자, 종교학자들에 의해 거듭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종교-과학과 관련된 최근의 책들을
상당히는 국내에서 번역서가 출간되기 이전에
어떤 경우에는 해외출판이 되기도 전에
또 어떤 경우는 국내 출판이 되어 자리를 잡은 도서들을
선택하여 읽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과의 격의없는 이야기, 토론을 통하여
그리고 새길교회의 예전의 신학강좌를 통하여
새길 교회 여러분들과의 자유스런 이야기를 통하여
신학, 종교학, 과학, 동양철학사상서 등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의 인지와 감정에 대한 저의 인지심리학 탐구를 통하여

적어도 저는 저의 믿는 바, 믿는 방식이
비록 아직도 대단히 부족하지만
저의 수준에서 다소 가다듬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교회에
그리고 이 과학과종교 독회 모임에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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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야기 4. ]

그런데 제가 그런 빚, 아니 큰 도움을 받았던 교회가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믿는 바, 믿는 방식의
옳음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믿는 바, 믿는 방식의 틀림을
(신앙뿐 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입장을 포함하여)
공개적으로 강하게 주장하며
자기의 입장을 다른 이들이 따라 올 것을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오프라인 이야기들이
온라인 글들이 자주 등장하고

이것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갈등과 거리둠을 초래하고
그 파장의 심각성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할 때에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멀어짐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에
작은 힘이라도 일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소 때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여러 달 병치례를 하여야 하는 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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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야기 5]

제가 60대 중반이 된 지금 시점에서
저의 일생 중에 가장 크게 후회를 하고 있는 일은

어쭙지않은 저의 20대의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저의 어머님에게
삶의 몇 십 년을 전통적인 기독신앙 속에서 믿음의 삶 속에서
그 신앙을 따라 착실하게 살아오시며 교회에 봉사하신
저의 어머님에게
더구나 두세 해 후에 곧 마취의료 사고로 돌아가실 저의 어머님에게
어쭙지않은 저의 회의적인 생각을 강하게 말씀드려서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회의의 여울을 스쳐 가셔야 하였을 일입니다.

제가 무엇을 안다고
어머님에게 조금이라도 일말의 회의의 순간을 드렸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불효자식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절히 듭니다.

저에게는 가장 큰 회한의 일입니다.
그 일을 생각할 때면 눈가가 젖어 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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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야기 6 ]

오래 전에 토론실에 글을 올리며
기독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며 산골에 사는 할머니
매일 마을 입구 성황당에서 맑은 물을 떠 올리고
자기 나름대로 가족을 위하여
자기 식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의 경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분의 기도, 믿음은
그 나름대로 진실한 것이고 우리가 인정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지식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믿는 바, 믿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믿음, 믿는 바, 믿는 방식은
그 나름대로 소중한 것입니다
단순히 믿음, 믿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전체가 반영된 믿음, 믿는 바, 믿든 방식,
달리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그의 삶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제가 저의 어머님에게 한 것처럼
당신의 믿음이, 믿는 바가, 믿는 방식이 틀렸고
나의 생각, 믿는 바, 믿는 방식이 옳다 라는 식으로
주장, 강변, 설득, 압력을 넣는다는 것은
어릴 때의 저처럼 무엇을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행동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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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야기 7]

그러하기에
- 교회의 신학강좌들에서 제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과학과종교 독회 모임의 여러 신학자들, 종교학자들, 기독교 이외의 신자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제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저의 전공분야인 인간의 인지와 감정 과정에 대한 탐구 결과에 의하면,
- 종교, 인지 관련 서양, 동양의 사상을 전개한 책들에 의하면,
- 교회의 여러 분과 나눈 이야기에 의하면
,- 그리고 교회의 여러분들과 개인적, 인간적, 정서적 사괴임에 의하면,

우리는 나의 믿음이, 나의 믿는 바가, 나의 믿는 방식이,
(나의 정치사회적 관점이나 행동성향을 포함하여)
옳고,
다른 이들의 생각은 틀렸다
다른 이들의 믿는 방식, 행동 양식은 틀렸다고
말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도
기도 개념의 본질도
신앙의 본질도
구원의 의미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당신의 생각은 틀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믿음은
기도는
각자의 삶의 전체가 반영된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 양식입니다.

나의 삶이, 나의 살아가는 방식이
당신의 삶, 살아가는 방식, 믿음, 믿음의 방식보다
더 옳다, 더 좋다
라는 말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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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야기 8]

어느 시골 마을에서
새벽마다 성황당에서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할머니를 떠 올려봅니다.

그 분의 기도는
그 분의 믿는 바는
그 분의 믿는 방식은
그 분의 삶은

진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믿음, 믿는 바, 믿는 방식에 대하여
소중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포용하는 것이
작은 믿음이라도 지니고 있고
다른 이를 생각하며 믿을 줄 아는
새길인이 취할 도리인 것 같습니다

나는
다른 이의
믿음, 믿는 바, 믿는 방식에
회의를 던져
그것을 흔들어 놓을
자격이
그만한 지식도,
생각의 깊음도,
삶과 생명에 대한 연륜도,
참 이해도

없습니다. !

우리의 형제와 자매라고 생각하는
다른 이의 믿음에 대하여

그 믿음이,
믿는 방식이
생명처럼 소중하기에

우리는
그 믿음에 대하여,
그 믿는 바에 대하여
그 믿는 방식에 대하여

한 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존중하며 떠 받들어야 합니다.

강한 주장과 설득의 시도를 통하여
흩으러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형제, 자매가 서로에게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할 수 있는
삶의 예의이고
믿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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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야기 9]

이상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바로
사실은 저의 부족한 생각, 행위를 대상으로 적용되는
저를 비판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순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저 자신은 아닌양
이야기를 전개한
그 점 사과드립니다.

보다
너른 이해와 앎과 믿음의

여러분들의 진정한 만남이 이어지는
그러한 믿은 공동체를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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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로 이해할 때, 화가 자비심으로 바뀐다.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보관하여 둔 신문 한 쪽이 나와서
밑줄 그었던 부분을 인용합니다.
- 출처: (중앙일보) 선데이 매가진, 2009. 6.28. 14 쪽의 일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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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부분 생략 -
...

“결국은
우리 모두가
같은 방주를 타고 있는 생명들,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로 엮어져 있는
형제자매임을

‘하나임을’
깨달아 알 게 되고

자신의 생각의 좁음에 대한 부끄러움에 철저히 바탕하여

다른 사람들을 널리 이해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며
그들에게 닥아가서

그들이
나와
사랑과 이해의
동질의 ‘우리’ 가 될 때에는

태평양도 다 들어가게 되는 게
우리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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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2010년 5월과 6월 초에 이정모가 한 생각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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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마음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윈리는 이야기 만들기이다'
'오랜 진화과정에서 이것은 환경의 복잡성에 적응하기 위하여
인간이 정보처리를 쉽고 잘 하기 위해
 동물을 넘어서 발전시킨
가장 인간적인 본질적인 마음 작동 메커니즘이다'
 
'그에 의하여
인간 삶의
상위수준의 의미가, meaning이  
비로소 생겨난다/'

'사람들은 평생동안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고, 그것을 살고,.
꿈에서도 그속에서 꿈꾸며, 그 속에서 삶을 마감한다.'

'모든 종교적 믿음도 별 다른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정치적 소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생명 존중 과 마찬가지로 ,
인간의 경우는
개인의
‘생명 존중’ -> '이야기 존중“
이어야 합니다

'이야기' 존중하기가
더불어 살아가는 기본이다.' 
 
그 사람의 종교적 믿음, 정치적 소신이
어떻건, 무엇이건 간에
.............

 
따라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
확신하는 사람 및 그 소신의
그 누구가, 그 이야기가  옳다는 것은
 
없다 !!!
 
그저 그 사람이 지어내는 이야기 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삶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여 주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할 자세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지는 확신은
그 자신이(‘뇌과학의 함정’ 책에 의하면 독립된 자신은 없다.)
그저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과 하나된 존재일뿐)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며 믿고 있다는 것일뿐
개관적 타당성과 신뢰성은 항상 ??? 반문되어질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 내의 수많은 다른 확신적 이야기들
사회 내의 수많은 다른 확신적 이야기들 ...
 
그 모두가
개인 편향적으로 지어낸 , 그리고 믿는 이야기일뿐
 
왜냐하면
인간은 오랜 진화 역사 동안 수없이 그런 활동을 반복하며
살아 남았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확신적,
서로 다를 수도 있는
이야기 속에 사는
 
서로 다른 이들을
 
그래도
사랑하며 산다.
 
부부가 그렇고
무모와 자녀가 그렇고
같은 교인이 그렇고
형제자매의 사이가 된 사람들도 그렇고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고
같은 인류가 그렇다
 
인간적 생명을 받아 살며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다른이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또 믿고
그렇게 살 수 있음을 
내가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 인간 삶에서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다른 이의 이야기를  진지한 공감을 갖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마음속으로 부터
존중하며 경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삶을 받아 태어나서

열심히 이야기를 지어내며
그를 믿고 사는
가여운. 그러나 가상한 존재이니까)
 
공감하며 들어주고
그 이야기를 '존중'하여 주는 일이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나의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그리고
나를 알던 이들에게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남아있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야기도 끝난다
 
나도
우리도
 
우리는
그저
수많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생명의 한 흐름일뿐
 
단지
인간으로서 나의 자취가 남는 것은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며 또 그것을 믿고 살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이 맞으면
때로는 동참하면서
이야기를 짓다가 간다는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 고리의
이음, 이음의 하나가 되었었다는 것
 
그것이
이 삶에서
내가
났다가
살다가
가는
의미 이다.
 
우리의 삶
삶 !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또한
신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