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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 2011

유전자만이 아니다. 문화도.; Not by Genes Alone + Culture, too

유전자만이 아니다. 문화도.
 
이번 달 [과학과종교 독회] 모임에서 읽을 책:
-피터 J. 리처슨, 로보트 보이드 (지음) 김준홍 (옮김)/
- [유전자만이 아니다] : 문화는 어떻게 인간 진화의 경로를 바꾸었는가
- 원제목: Not by Genes Alone: How Culture Transformed Human Evolution
-  511 쪽 / 출판사: 이음/ 2009/
 
- 책 소개 사이트: 목차가 상당히 자세히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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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된 서평]
 
김우재님의 서평
- 본성 대 양육'의 지루한 논쟁 구도는 분자생물학과 더불어 '유전자와 환경'으로 옮겨갔다. 이분법에 익숙한 서구의 지적 전통은 여전히 이러한 구도 속에서 암투 중이다. 그러한 논쟁의 한 가운데서 탄생한 것인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다. 물론 최근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은 이들의 소박한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시간이 지났고, 주목도 받지 못하지만 이들의 작업만큼은 기념비적인 것이다.
 
각 신문의 신문기자들의 서평
 
환경일보 강은미 기자의 비교적 상세한 서평
 
이정모의 생각:
 
- 이 책의 요점: 문화는 유전자에 영향을 준다. 진화 과정에 대한 문화의 영향이 크다. 문화와 유전자는 공진화한다, 따라서 문화 요인으로 인간 마음의 특성과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절대로 진화론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영향만 있고 문화의 영향은 유전자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부 잘못된 환원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편견일 뿐이다. 인류의 진화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유전자와 문화 요인을 함께 생각하여야 한다.
 
-인간의 사고 경향은, 노벨상 수상자 카네만 교수 등이 실험 연구들에서 보인바와 같이, 편향과 휴리스틱스적 사고 경향이 그 본질 특성이며 인간은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여 상황을 단순화 하여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하의 나의 생각도 예외는 아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거나, 뇌를 알면 마음, 성격, 행동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러한 믿음이, 이러한 편향적인 단순 그러한 생각의 예들이다. 과학에서 무엇을ㅊ 잘 모르는 과도한 환원주의가 그 길을 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 수백년동안 마음(일반인의 비과학적 용어로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하여 계속 생각을 전개하며 학문적 이론을 전개하여 온 철학자들의 물음의 본질, 배경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 같다. 아니 심적 현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이 부족한 때문인지 모른다.
- 이 책에서는 그러한 단순 일반화적 사고를 탈피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유전자가 바로 인간의 행동과 다른 심리적 현상의 진화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다 라는 널리 퍼진 환원주의적 생각에 이의를 전개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유전자가 인간 마음과 행동을 부분적으로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문화 요인도 유전자에 영향을 주며 진화적 과정에 기여하고 있고, 유전자와 문화가 공진화 한다는 것이 그 핵심 주장이다.
- 저자들은 수많은 지지와 반대 사례들을 논리ㅣ적으로 분석하며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한다. 그러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들을 분석한 저자들의 지적 수고에 경의를 표한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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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평]
Journal of Artificial Societies and Social Simulation (JASSS)의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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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학술지 Zygon의 서평
Genes and Cultures—Boyd and Richerson
THE INTERTWINED ROLES OF GENES AND CULTURE IN HUMAN EVOLUTION
by William Irons
in Zygo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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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생태, 사회적 요인 간의 상호작용을 주장하는 글
Is there a genetic contribution to cultural differences? Collectivism, individualism and genetic markers of social sensitivity
Baldwin M. Way and Matthew D. Lieberma
-- SCAN (2010) 5, 203-221
 

Monday, August 29, 2011

창업의 인지심리 (영문)

창업의 인지심리 (영문)

한국적 상황에서의 창업에 대하여 보다 많은 인지심리학적, 인지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실제에 적용되어서 많은 이를 도와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The Cognitive Psychology of Entrepreneurship
by NORRIS F. KRUEGER, Jr.

http://sn.pronetos.com/documents/0000/0011/acs_06.pdf

Sunday, August 28, 2011

Going beyond the Brain Culture. // (text in Korean)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 Culture.
                                                                -(text in Korean)
[Abstract]: Quoting the reviews of the two books on brain, [Brain Culture: Neuroscience and Popular Media] and [The Tell-Tale Brain: A Neuroscientist's Quest for What Makes Us Human], it was discussed that we should go beyond the current "brain" fad. The current fad of 'brain culture' was explained as a phenomenon not reflecting the true facets of science, but caused by the very nature of human cognition of biased heuristic thinking and of human mind, driven by the narrative principle of constructing stories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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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과학 지상주의 문화에 대한 반성: 최근 해외에서 발행된 두 권의 책과 관련하여 
 
요즈음 국내나 서구나 ‘뇌과학 지상주의’ 문화가 학계나, 매스컴이나,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금년에 해외에서 출간된 뇌과학에 대한 영문 서적 두 권에 대한 서평을 참조하면서 국내에서 널리 일고 있는 뇌과학에의 몰입 문화 경향(pop culture)에 대하여 몇 가지 개인적 생각을 전개하여 볼까 한다.
 
먼저 언급하려는 책은 미국 텍사스 주 Southwestern 대학의 Communication학과 조교수인 Davi Johnson Thornton 박사가 쓰고 Rutgers University Press에 의해 2011년 5월에 출간된, [Brain Culture: Neuroscience and Popular Media] 라는 책이다
- 동명이서의 다른 책들이 있음에 주의하세요 -
 
사우스웨스턴 대학의 자료에 의하면(http://www.southwestern.edu/live/news/5504-brain-culture),
이 책에서 Thornton 교수는 지금의 사회문화적 ‘뇌지상주의’ 유행은 뇌가 보여주는 실제 과학적 사실 이상으로 뇌영상 그림에 사람들이 빠져 있는 상태이라고 보며,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문화적 유행을 과학적 뇌가 아닌 ”수사학적 뇌 (rhetorical brain)‘에 빠진 상태라고 본다. 인지신경과학 분야의 과학적 발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의해 묽어진(맹물을 탄) 해석적 틀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뇌를 훈련시키면, 적절히 사용하면, 학습능력을 높인다던가, 회사나 대인관계에서 잘 적응한다던가, 아동발달을 촉진시킨다.” 등의 자기계발서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즈음의 현상에 대하여 Thorton 교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추세에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러한 자기계발서들 또는 학습능력증진서들이 인지신경과학의 과학적 사실 그대로를 넘어서 일종의 사회문화적 유행의 물타기 또는 키우기를 하고 있고(비록 긍정적으로 도움이 되더라도), 현재의 ‘뇌’유행은 과학적 사실에다 뇌영상 그림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회문화적 해석을 덧씌우는 작업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하여는 Brain Picking이라는 흥미로운 블로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Maria Popova가(대학원 시절에 뇌영상 공부를 하였음) 유명한 월간지 [The Atlantic] 지에 'Brain Culture': How Neuroscience Became a Pop Culture Fixation“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8월에 서평을 썼다.
아트란틱 지의 부제목(A book looks at how the cerebral cortex has become a 21st-century version of Warhol's soup cans or Marilyn Monroes)을 참고하고 이 기사관련 글들을 종합하여 전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뇌(지상 주의) 문화의 유행”은 뇌과학의 사실적, 과학적 발견을 다룬다고 하기 보다는 뇌영상 사진들에 매료된 인간의 시각 중심적 사고(“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과다일반화적 사고, 마음의 이야기 짓기적 본질, 노벨상 수상자 카네만 교수 등이 발견한 편향적 오류적 사고 경향 등에 바탕을 둔 일종의 유행적 사회문화현상이다. 맑은 과학적 사실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뇌에 대한 일종의 신화적 표현을 통해 그리고 그 기능적 가능성에 대한 낭만적 이야기 짓기를 통해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 뮤즈가 된 것이다 (The brain, it seems, has become a modern muse.// http://www.biopsychology.com/news/index.php?descType=always&type=chapter&id=1&page=0 에서). 생물적 기관인 ‘뇌’가 하나의 ‘문화적 기관의 지위(cultish status)를 지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매일 우리는 신문방송에서 “뇌과학이 .... 이런 이런 사실을 새로 발견했다. 그 의의는 심대하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 이렇게 달라질 것이다.”라는 매스컴 기사를 접한다. 또 새로 발간된 자기계발서에서는 ”....이러 이렇게 하면 뇌가 ... 이렇게 달라질 것이고, 그를 통해 우리는 ..... 이러 이러한 증진된 학습능력, 대인관계 능력 ...등등을 지니게 된다“라는 글이나, 광고문구를 보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는 뇌의 지위, 기능, 미래 가능성 등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거나 믿고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과, 뇌 영상 또는 관련 과학적 단서 사실들을 ’교묘하게‘ 연결한 -일종의 수사학적, 화용론적- 이야기 틀 속에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이나 그를 받아 수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착각을 생성하고 있고 그에 빠지고 있다고 절대로 믿지 않는 그러한 이야기 틀 속에 -)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위의 사이트의 표현을 번안하자면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우리가 바라는 바 (특히 뇌를 긍정적 효용성을 위하여 어거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바) 사이의 단절의 실로 비극적인 드러남(a tragic manifestation of the disconnect)일 뿐이다.
 
이 모든 것, “뇌과학이 .... 이런 이런 사실을 최근 발견하였고, 그것은 우리에게 .... 이러 이러한 심대한 의의가 있다“ 는 등의 매스컴 기사 또는 책자들의 주장은 사실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현상을 (노벨 수상자 카네만의 주장처럼) 늘 편향적으로 왜곡하여 사고하며 과대 일반화, 이분법적 범주화를 하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사고 경향성, 그리고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사실이기보다는 자기/우리 중심적 구성으로서의) 이야기(내러티브) 틀을 만들어 가는 인간 인지의 본질적 특성]]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하나의 사회-문화적 유행(fad/ pop-culture)적 개념틀에서 나온 내러티브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거대한 ‘인지적 착각(Cognitive Illusions)'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이정모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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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언급할 서평은 널리 알려진 웹진 사이트 “Wired"에서, 조나 레러 {”푸르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라는 책(http://www.yes24.com/24/goods/2783494)의 저자}가 Thorton 교수와의 인터뷰 형태로 쓴 서평이다.
그는 신경과학의 ‘언어’ (수사; rhetoric) 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 기사에서 저자와 인터뷰를 하는 레러 두 다, 뇌과학 유행을 ‘나쁘다’라고 명시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비껴가기는 하였지만, 하여간 요즈음의 일반시민의, 뉴스미디어의 ‘뇌과학 열풍’이 일종의 수사학적 문화적 현상이며 참 과학과는 거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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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언급할 책은 금년(2011) 1월에 Norton회사에서 출간한
저명한 신경과학자 라마찬드란의 책 [“The Tell-Tale Brain: A Neuroscientist's Quest for What Makes Us Human” - by V. S. Ramachandran -] 이다.

이 책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서평을 썼지만, 여기에서는, 뉴욕타임즈 북리뷰판에 지난 3월에 McGinn 교수가 쓴 서평을 중심으로 필자의 개인적 생각을 첨가하여 전개하겠다.
콜린 맥긴교수는 옥스퍼드대 졸업후, 런던대를 거쳐서 미국 마이아미대학 철학과에 부임하여 철학을 가르치며, 심리철학 주제에 대하여 계속 왕성한 연구, 저술 활동을 하여온 저명한 철학자이다.
 
책 저자 라마찬드란은 UCSD의 ‘뇌 및 인지 센터장’으로,
(라마찬드란의 다른 TED 강연 동영상: http://blog.daum.net/engineer66/8370464)
이 2011년 새 책에서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 결과들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경현상은: phantom limbs, 시각, 공감각, 거울 뉴런, 자폐증, 정서, 언어, 미적감각, 의식 등이다.
 
여기에서는 나는 라마찬드란이 밝힌 신경과학적 발견과 그 의의에 대하여서 보다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심리철학자 McGinn 교수가 비판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맥긴 교수는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저자인 라마찬드란 교수 보다는 신경과학자 일반과 ‘뇌과학 지상주의’ 열풍에 매료된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 비판을 던지고 있다. 그 비판을 몇 개의 조목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라마찬드란 박사 등 신경과학자들은 지나친 신경환원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그들은 철학에서 왜 수세대를 걸친 그 긴 세월동안 심-신의 문제를 논의하여 왔는지, 왜 그것이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학술적 문제가 되어 왔는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다. 여러 심리 현상은 신경적 메커니즘으로 단순히 환원하여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리현상은 개념적 물음의 문제이지 신경적 구조의 기제(기작; 기전)의 문제가 아니다(These are conceptual question, not questions about.... neural machinery..). 라마찬드란은 왜곡, 생략, 과장 또는 (과대)일반화를 하고 있다.
 
2.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독특하다(우수하다는 의미의)고 하는데, 그건 인간중심주의의 anthropocentrism의 말이다. 또 낙관적 측면만 신경과학적으로 기술하는데 어두운 측면도 있다.
 
3. 라마찬드란의 이야기는 과학적 이야기가 아니다, 가치가 개입된 평가적 이야기일뿐(not scientific at all. it is evaliative talk) 과학적 정당화(justification) 대상이 못된다.
 
4. 그렇다면 왜 신경과학적, 뇌과학적 발견은, 이야기는 우리를 그리 매료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뇌신경 현상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에 뜨는 쇠가 신기하게 여겨지듯이, 전혀 다른 실체라고 생각하여온 뇌와 마음이 관련되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그에 매료되는 것이다. 신경적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연결시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마음의 의미구조에 우리의 매료에 열쇄가 있는 것이다. 시각적(뇌영상) 자극을 단서로 하여 개념적 연결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인간의 이야기 짓기 중심의 마음의 의미구조가 전제되어서야 비로소 뇌과학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우리를 매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이야기 짓기는 사회-문화적인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 짓기, 개념적 연결 사고를 하는 인간적 의미구조를 제거한다면 뇌과학적 (아니, 더 넓게 이야기하여 어떠한 과학이라도 그) 발견 사실들은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뇌에 대한 과학적 발견 그 자체가 그냥 그대로 심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 현세대의 한국적, 더 나아가서는 범세계적 인간 대부분의 착각이라는 문화적 유행(pop-culture)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사는 문인들이 서로의 힘과 생각을 모아서 발간하는 계간지 [시와 반시]의 2011년 가을 호에 게재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던 원고의 초벌 글을 보완, 편집하여 여기 아래에 첨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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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을 넘자면? :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의 연결점인 인지과학의 새 틀
 
-이정모-
(계간지 [시와 반시] 2011년 가을 호)
 
1. 뇌과학과 주변 학문들
 
이전에는 해부학 중심이던 신경과학이 20 세기 후반에 뇌영상기법 등의 방법론의 개척에 의해 뇌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연구 방식을 재구성하면서 뇌연구 결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로 뇌과학이 과학의 총아로 떠올랐고, 뇌과학의 연결 성과와 가능성에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뇌과학이 일반인의 지적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뇌의 해부학적 측면이나 유전학적 생물적 기반보다는 뇌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 성과 때문이었다. 일반인이 관심을 가지는 뇌의 그 기능은 실상은 뇌의 심적(인지) 기능이다. 그러한 면에서 뇌과학이 각광을 받는 까닭은 사실은 뇌와 마음의 연결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뇌과학 이외에도 인지과학, 인지신경과학 등이 있다. 현재 추세로는 이들 학문간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 서로 중첩되는 분야가 많으며 연구자 자신도 자신의 연구가 어떤 분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미국 대학들에서 뇌과학 학과도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명시적으로 인지과학 연구를 표방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MIT 등에서와 같이 ‘뇌 및 인지과학 학과’가 학과의 공식적 이름인 것은 이러한 학문적 경계의 애매성과 뇌과학이 인지과학적 연결이 없으면 공허한 것임을 잘 나타내어 준다.
 
각광을 받으며 떠오른지 20 여년 밖에 안 된 뇌과학이 다른 학문들과 연결되어 많은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 내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현재(특히 국내에서는)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에 뇌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진전된다면 인간의 마음 작동의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입장이 일반인들이 지니는 생각이다. 이 글은 그러한 과다 단순화한 관점을 넘어서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2. 인지주의 틀: 형성과 인지과학
 
뇌과학의 형성과 발전의 전파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20세기에 인류문화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인지주의’ 틀의 형성이라고 하겠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기에 머물던 고전적 계산기가 인지주의 틀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의 지능적 컴퓨터로 재개념화되어 새 세상이 열렸다. 생명체인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만든 인공물의 하나인 컴퓨터가, 본질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동류의 시스템이라는 발상의 대 전환으로 인하여 인류 문화에서 컴퓨터 시대, 디지털 문화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인터넷 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디지털컴퓨터가 모두 상징(기호)을 조작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라고 보는 관점을 정립한 이러한 인지주의 틀의 출현을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과학혁명, 곧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를 최초로 연구하여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인 스페리(R. Sperry)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지주의의 등장은 하나의 「과학혁명」이었고, 과거의 물리학 중심의 전통적 과학에서처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결정된다는 상향적 입장이, 인지주의 과학혁명에 의하여 하향적 입장과 조합하여 ‘이중 방향’, ‘이중 결정’ 모형으로 과학이 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과학관과 세계관이 급진적으로 수정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인지과학과 여러 테크놀로지(특히 인공물과 인간의 상호작용 관련 기술)의 수렴, 융합은 또 다른 미래 가능성들을 시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1세기는 ‘국제화시대’가 아니라 ‘인지시대(the Cognitive Age)’라는 선언적 칼럼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넓게 본다면 인지과학은 뇌과학을 그 하위 구성영역의 하나로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본다면 뇌과학을 인지과학과 차별화 하여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뇌과학 탐구 주제에서 인지 기능을 제외하여야 하고, 그렇게 되어 남는 뇌과학은 별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른 대안으로 신경과학자들의 일부가 주장하듯이 인지과학은 신경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인지과학은 신경과학 또는 생물학의 하위 학문이 되는데, 이것은 곧 ‘의미’란 신경적 활동 이상의 것이 아니다 라는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귀착된다. 이 관점은 인지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수용되기 힘든 입장이다.

3. 뇌과학 지상주의의에 대한 반문
 
21세기의 둘째 10년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은 과연 어떤 시점일까? 인류 문화, 뇌과학을 비롯한 과학과 유전공학, 아이폰 등의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인간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의 정립이 요청되는 시점일까?
 
우리는,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심적 현상을 뇌의 신경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뇌과학의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현재에는 뇌과학 연구가 갓 출발하여 진행되는 단계이어서 모든 것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뇌과학 연구가 충분히 발전하고 진행된다면 인간사의 모든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뇌과학의 신경과정 작용의 환원주의적 원리에 의해 이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틀이 일반인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신경과학자들, 과학학술지, 매스컴이 ‘뇌는 곧 마음(mind)이다’ 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뇌 연구 결과 하나 하나에 대하여 매료되어 뇌 지상주의에 매어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마음은, 의식은 뇌의 신경적 활동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신경과학자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에는 어떤 잘못이 있을까? 뇌에 대한, 신경과학에 대한 나의, 우리의 매료됨이 과연 21세기 내내, 그리고 22세기와 그 후의 미래에도 지속될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뇌과학적 발견과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의 변화에 내가 뒤지지 않고 따라가기 위하여, 그리고 21세기 후반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생각의 틀을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까?

4. 뇌과학을 넘어서 1:
 
지금 21세기 초엽 현재, 지성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그리고 무시 못 할 중요한 생각 틀의 변화의 하나는, 바로 ‘나의 의식(마음)’은, 나의 몸 더 좁게는 ‘나의 뇌’에 의해 ‘나’가 아닌 것과 구별될 수 있다는, 즉 ‘나는 나의 뇌다’라는 식의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마음, 의식을 밖으로 ‘확장시켜서, 뇌-몸-환경을 하나의 불가분의 총체적 단위로 이해하려는 스피노자 식, 메를로퐁티 식의 생각이 전개이다.

카르트는 인간의 몸을 동물과 연속선상에 있는 하나의 자동기계로 생각하며,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몸을 동물적기계로 보았고, 마음과 영혼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음은 사고하는 실체이나 외연을 지니지(공간을 점하고 있지) 않는 반면, 몸은 공간에서 기하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외연을 지닌 실체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수정론적인 입장이 이후에 있었으나, 서구의 문화사에서는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적 입장이 지배하여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신경과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마음을 뇌의 신경적 활동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일원론(마음=뇌)적 관점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기는 하였으나, 정신(마음)과 물질을 대립적으로 보는, 또는 생각의 주체와 그 대상이 되는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데카르트식 존재론의 관점은 아직도 현재의 신경과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뇌 = 마음’, ‘마음 = 뇌’, ‘의식 =뇌’ 라는 단순한 과학적 믿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움직임이 철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태동하고 있고, 이러한 ‘마음’ 개념의 재구성의 추세가 더욱 확산된다면 단순히 철학,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과학 전반, 그리고 인공지능, 로보틱스, 다른 인간관련 공학 등에 강한,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특히 로보틱스의 연구에는 가장 강한,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된다.
 
저명한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 데이빗 찰머스 등이 이러한 발상의 전환 중심에 서 있으며, 여러 학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물론 강한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구호의 핵심은 ‘데카르트를 넘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마음)과 물질(신체),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구별한 데카르트 식의 존재론의 개념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현재 신경과학의 부분인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관점이(그러나 신경과학자라고 하여 모두 환원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활동을 왜곡하여 이해, 접근, 탐구하게 되고,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철학자들의 일부가 늘 그렇게 이야기하여 오던 이야기이기에, 또 철학자들이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지 못할 이유는 이러한 논의를 최근에 다시 전개하도록 촉발시킨 사람들이 철학자가 아닌 인공지능학자, 로보틱스 연구자,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MIT대학의 미디어랩의 중심연구자였던 로드니 브룩스 교수는 인공지능, 로봇 등을 연구하던 중에, 과거의 데카르트 식의(고전적 인지과학) 인공지능이나 로봇시스템 이론으로서는 제대로 된 인공지능시스템이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스템들에 내장된 프로그램과 몸-환경이 밀접히 연결된 새로운 개념화가 필요함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이에 다른 인공지능 연구자, 로보틱스 연구자들이 점차 공감하였다.
 
공학자들의 이러한 강한 이의 제기에 힘을 얻은 철학자들은 과거의 현상학적 철학 전통에서 이야기하던 개념들을 다시 꺼내어 되생각하고 가다듬어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몸-환경-활동의 중요성을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생각들에 현재까지 진행된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동물행태학, 인류학, 로보틱스 등에 대한 연구를 연결하여 마음, 의식, 존재 개념들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재구성의 결과로, 마음은, 의식은, 뇌를 넘어서’ 개념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알바노에의 「뇌과학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바를 인용하자면, ‘마음, 의식, 나 = 나의 뇌(의 활동)’ 이라는 데카르트 식의, 신경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거대한 착각’에서 이제는 우리가 빠져 나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자연과학을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적 재개념화 도움에 의하여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뇌는 마음과 같지 않다’, ‘마음(의식)은 뇌와 몸, 그리고 환경(다른 인간과의 관계 포함)의 상호작용 활동에 의존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몸과 환경을 빼놓고 “뇌가 곧 마음이다” 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유기체의 삶은 (뇌의) 내부에 있지 않다’, ‘세계는 뇌 안에 만들어지거나 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환경과의 행위적 활동) 관계에서 (비로소) 생긴다’, ‘뇌 혼자서 무엇을 이룰 수 없기에, 실상 모든 「의미」는 머릿속에 없다’, ‘우리의 경험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뇌 자체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환경)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 (행위, 활동) 관계다’,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가 의식의 자리라는 신경과학자의 경솔한 확신, 착각’, ‘우리가 우리의 뇌의 신경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집에서 실험대로 가져온 선입견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 일반인, 매스컴 등 우리 모두가 빠져있는 이러한 (뇌과학적) 거대한 착각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포기하고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거대한 착각을 벗어나서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체화적 인지’ 또는 ‘확장된 마음’의 틀로 지금 인지과학의 대안적 관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4. 뇌과학을 넘어서 2: 체화적 인지 틀의 형성
 
인간의 마음에 컴퓨터 메타포를 적용하여 1950년대에 출발한 인지과학은, 이후 1980년대에 뇌 메타포를 적용하여 연결주의와 신경과학(뇌과학)을 발전시킨 이후,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또 다른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 변화의 틀은 위에서 언급된 탈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움직임이다. 
최근에 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또는 확장된(물리적 공간에 연장된) 마음: Extended Mind))'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존재론의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 관점이나, 그 반대인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일원론 관점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이다.
 
이 틀은 인간의 마음, 인지가 개인 내의 뇌 속에 추상적 언어적 명제 형태로 표상된 내용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몸을 가지고(embodied) 환경에 구현, 내재되어(embedded) 사회문화환경에 적응하는 (몸이 있는) 유기체가 ‘환경’과의 순간 순간적 상호작용 행위 역동 상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즉 몸과, 문화, 역사, 사회의 맥락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되는 그러한 ‘역동적 활동’으로서의 마음임을 강조하는 접근이다. 
이 ‘체화된 인지’의 보는 틀은 고전적 인지주의의 정보처리 접근이 지니는 제한점을 벗어나려 한다. 즉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한 개인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인지적 표상이나 정보처리가(고전적 인지주의 입장) 아니라, 몸으로 환경 속에 구체화되며, 몸의 활동을 통하여 환경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로서 마음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리고 환경의 다른 인간의 마음이나 각종 인공물에 분산표상된 마음,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상황 지워지며 행위로 구성되는 마음으로서 보려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의 심적 상호작용의 실제는 몸에 의존한다. 따라서 감각운동적 바탕이 마음의 핵심이 되며, 고차 심적 기능도 이러한 기초의 제약과 허용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각은 능동적이며, 행위는 지각에 의해 인도되며, 신경계, 몸, 환경 요인이 실시간 상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이해함을 통하여 과학적 설명이 주어진다. 최상위의 매스터라고 하는 뇌에 의한 전반적 계획이나 통제가 없이도, 분산된 단위들의 지엽적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가조직적(autopoietic)으로, 창발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 심적 현상이다. 마음은 환경에 확장된, 상황지어진 것으로 분석, 이해되어야 하며, 자연적, 생태적 상황에서 맥락이 고려되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통적 논리적 형식적 접근보다는 환경과의 역동적 시간 경과와 상호작용성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역동적 접근을 통하여 탐구되어야 하며, 현상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체험되는가 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도 설명적 요소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마음이 이루어내는 ‘의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할 수 있다.
 
즉, 
[1] ‘뇌’를 포함하는 ‘몸’과, 
[2] ‘환경’(각종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과, 
[3] 그리고 이 둘이 연결되는 상호작용적 활동(interactivity)의 

세 측면이 서로 괴리되지 않고, 하나의 역동적 전체로서 개념화되는 그러한 접근을 하여야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듯이 ‘몸’이라는 전체도 아닌, 한 부분적 실체인 ‘뇌’에서 마음의 모든 것이 일어나며, 환경과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에 연원을 둔 이러한 개념적 변혁에의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마음과 몸에 대한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심신이원론이나,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뇌과학자들이 지니는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환원주의적 일원론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의 펼침이다. 이 체화된 인지 접근은 고전적 인지주의에서 배제되었던 ‘몸’을 마음의 바탕으로 되찾게 하며, 몸을 지닌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환경’을 인지과학과 심리학에 되살려 놓게 하며, 공간적 연장이 없었던 추상적 ‘정신적 실체’라는 마음이 아니라 ‘몸을 통해 환경에 연장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으로 마음 개념을 재개념화 할 가능성을, 아니 그래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개념을 이렇게 ‘뇌를 넘어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는 실체의 개념으로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재구성의 틀은 심리학, 인지과학의 기초적 이론 틀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 등), 테크놀로지(로보틱스 등), 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적, 응용적 틀의 재구성에 (뇌과학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상당한 시사를 지니게 된다.
 
이 ‘체화된 인지’ 틀이 떠오르기 이전에 이미 인지과학의 틀을 도입하여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었다. 학문간 수렴, 융합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인지정치학,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신경경제학, 행동법학, 인지법학, 신경법학, 학습과학 등의 새 분야들의 떠오름이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그러한 분야들에서 뇌의 신경적 현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개념화하려던 시도들의 편협한 한계를 넘어서, ‘체화적 인지’의 틀을 도입하여 인간과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미래 사회과학의 과제로 남는다.
 
공학의 분야들 중에는 처음부터 인지과학의 한 중심 분야이었던 인공지능 연구의 연결에 의하여 각종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나 디지털 기기의 디자인 분야들, 특히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어 왔다. 이러한 분야들에서 뇌과학 연구의 발전 결과와 그 시사를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연구 영역이나 뇌-로봇 인터페이스(BRI) 영역이 이러한 시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듯하면서도 문제점이 계속 남는다.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meaning)’를 습득, 창조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존재, 환경과 괴리되지 않고 하나되어 살아 움직이는 몸이 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의미를 지어내는’ 삶을 인공적으로 구현하기 힘들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체화된 인지’ 틀은 여러 가지 새로운 개념적 재구성을 시사한다. 예술의 분야에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채, 몸을 통해 구현되는 마음’의 관점은 문학, 음악, 미술, 공연 등의 분야에서 여러 새로운 개념적 구성 작업을 가능하게 된다. ‘뉴 미디어 이론’에 새 인지과학적 틀이 깊숙이 관여되는 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의 분야는 이를 넘어서 또 다른 개념적 재구성이 요청된다. 즉 내러티브의, 이야기의 문제이다.
 
5. 뇌과학을 넘어서기 3: 내러티브적 마음
 
인문학자 마크 터너 교수는 “문학적 마음”이라는 책에서 ‘인지과학의 중심 주제가 사실상 문학적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음의 기본 원리이다’ 라고 하였다. 로이드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에 의하면 내러티브란 인간 마음의 기본적, 일차적 작동 원리이다. 인지과학 출발의 기틀을 닦은 심리학자 브루너(J. Bruner)는 의미 만들기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며, ‘의미’라는 것은 ‘상징(기호)과 그 지시대상’에 의해 정형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에 바탕을 둔 ‘내러티브적 해석’에 의해 매개되고 조정되고 또 재조정되어서 그 맥락적, 개인적 다양성이 살려지고 그 문화적 체계 내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석 틀에 의해서 비로서 생성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넓게 해석하자면, 의미란 문화공동체의 환경에서 부여되는 역동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이며 내러티브적인 것이지, 환경과 별개의 독립적 실체로 개념화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과정이라는 하드웨어적인 것 그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다양하고 수용자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현상적, 심리적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가 아침부터 밤까지(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열심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이야기’적 의미를 양산하여 내는 그러한 존재이고, [마음의 본질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 생산 공장’]이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인간적 존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란 한 인간이 몸을 통해 환경에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서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체험적으로 엮어 내는 이야기적, 내러티브적 해석이 바탕이 되는 의미이다.
 
이는 비록 환경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정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는 되지만, ‘뇌를 넘어서’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역사와 문화와 개인적 일화들이 엮여져 짜여지는 문화적 의미의 체계이다. 사회문화적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생물학적 그 무엇이다. 뇌과학의 신경적 과정 현상으로만은 도저히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인지적 산물이다.

인지과학에 내러티브적 접근의 도입이 필연적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결정적 산물이며 또한 인간 마음 활동인, 문학을 인지과학에서 연결하여 탐구하여야 하는 것이 요청될 것이다.
 
 
6. 맺는 말: 인지과학과 문학
 
인지과학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기술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들의 문학활동과 독자의 심적활동이 인지과학에서 논하는 언어이해와 마음이론의 적용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생각할 것일까에 대해 저자가 나름대로 생각하여, 즉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저자의 마음이론에 바탕을 두고, 저자 자신의 생각을 상징으로, 표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읽으면서 독자는 자기의 기억에서 ‘이야기(내러티브)적 원리’ 지식과 각종 세상사 관련 지식을 동원하여 그 상징 표상을 정보처리하고 해석하여 이해하고 그것이 정서적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감흥을 갖게 된다. 
문학작품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저자의 글 표현은 독자가 독자 자신의 기억에서 어떠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야기적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기호적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이 해석과 구성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지(정서를 포함한) 과정이며, 인지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과거의 문학(비평)이론들로서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 등의 입장들이 있었다. 이 틀이 20세기 말에 무너지고, 이제는 문학의 내용 전개나 예술을 자연주의에, 진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거나 인지이론에 의거하여 이해 및 분석하고, 비평하고, 기술하려는 입장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기존의 문학(비평) 이론은 주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만 강조하였지, 그러한 문학활동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인지적 측면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 결과가 지니는 시사점을 무시하였다. 실제의 인간은 진화역사적으로 변화/발달한 몸을 지닌 생물체인데, 과거의 문학은(적어도 문학비평이론) 이러한 문학적 산물을 내어놓고 또 이해하는 인간이 자연의 존재라는 ‘자연 범주’ 특성을 무시하여 왔다. 
과거의 문학비평 이론은 문학작품, 예술 등과 관련된 인간 마음의 ‘자연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숨겨진 복잡성」에 대하여 학문적 인식, 과학적 지향함의 수용이 없었다(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아니, 실제의 예술작품 생성 작업 현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나, 문학(비평)이론가들은 문학이론 구성에서 이러한 부면을 무시하여 왔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인간 삶에서 무엇을 위하여 생겨났는가, 문학활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개개의 문학작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들이 진화이론적 관점에서,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앞으로 문학과 인지과학의 연결분야가 인지과학의 응용분야로서 발전될 뿐 아니라, 이 분야가 발전되면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상위수준의 인지과학 이론틀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인지과학적 연구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자체도 문학과 연결됨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보다 거시적인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전개할 수 있음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이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의 작동원리가 본질적으로 ‘내러티브 엮기이다’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제, 인지과학을 위하여서, 그리고 문학을 위해서라도 문학과 인지과학이 연결, 수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의 상위범주인 인문학이 인지과학과 연결되어야 한다. 인지과학과 문학을 연결하는 연결점에서 ‘내러티브적 이야기에 바탕을 둔 인문학’과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인 인지과학이 수렴-융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드웨어적 작동 원리를 밝히는 뇌과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뇌과학은 인간의 의미있는 미래를 위하여 필요조건일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뇌과학 지상주의의 문화적 유행을, 그러한 인지적 착각을 넘어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