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지(cognition)’ 개념의 재조명: 한 1세대 인지과학도의 생각]
인지과학회 춘계 학술대회 전후 몇 주일동안 저에게서 일어난 일을 열거하고 ‘인지’ 개념의
재조명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2012년 4월 30일에 ‘심리학사’ 강의 파일 2장. 르네상스에서 17세기 전까지를 웹에
올린 후에 17-18세기의 심리학의 역사 글을 1주내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건강이 뒷받침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는 Descartes의 책들,
데카르트에 관한 책들, 문헌들을 읽느라 두 주 가량이 더 흘렀고,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과 몸 기계론을 훑다가, 20세기의 그의 후예들, 20세기
전반의 마음-기계 연결 이론에 다시 생각이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저의 2001년의 책, [인지심리학:
형성사, 개념적 기초, 조망]의 4장 ‘마음과 기계의 연결: 튜링 기계 이론의 형성 배경’과, 2009년의 책, [인지과학: 학문간 융합의
원리와 응용]의 3장, ‘ 마음과 기계 개념의 이론적 연결 역사’의 두 내용을 합하고 이에 인터넷 링크 자료 등 추가 내용을 보완하여 새
파일(작은 책에 가까운 monograph)을 만들어서 웹에 올려 나누어 보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한국인지과학회 춘계학술대회 전에 웹에
올려 공개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읽어내야 할 문헌들이 계속 생기고,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계획한 대로 못 하고
학회에 참석하였었습니다. 학회가 끝난 지 며칠째 되는 오늘도, 새로운 문헌자료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 상태 때문에 ‘마음-기계 연결 역사’
파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존경하는 영국의 저명한 인지과학자의 한 사람인 Margaret A. Boden
(http://en.wikipedia.org/wiki/Margaret_Boden) 교수의 2006년 책, [Mind as Machine: A History of Cognitive Science] -
총 1,631 쪽의 두 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책이며, 인지과학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한 번은 읽어내야 하는 책입니다. 아직 저도 완독하지 못했지만 -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인지과학, 인지심리학의 ‘인지’가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가, 이 분야를 열었다고 볼 수 있는
U. Neisser교수의 1967년 책, [Cognitive Psychology]에서 Neisser 교수가 ‘인지(cognition)’의 정의를
당시(즉, 45 년 전)에 이미
“인지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모든 심리현상은
인지현상이다(... cognition is involved in everything a human being might possibly do;
that every psychological phenomenon is a cognitive phenomenon)”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지’의 개념을 인식이나 사고 중심으로 좁게 생각하는 학생들과 인지과학 및 타 분야 전공
선생님들에 대하여, 이정모가 생각하는 ‘인지’의 개념을 “그런 좁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 마음과 행동이 짓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라고 강변하며
어려운 논쟁을 계속하여 온 저에게 놀라운 지원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에 그런 정의가 있다는 것을 어째서 망각하고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부랴
부랴 그 책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이 책은 대학원생들의 must-read 책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오래된 1967년
책의 4쪽에 정말 그런 문장이 살아 있었습니다. !!! ...! (물론 이 책 내에는 통상적인 지적 과정 중심 의미의 좁은 의미의 정의도 다른
쪽에 있었습니다.)
또 인지과학 전문 학술지의 하나인 ‘Cognition’ 지에서는
논문모집을 하며 ‘인지’의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Cognition is an international journal that publishes theoretical and
experimental papers on the study of the mind. It covers a wide variety of
subjects concerning all the different aspects of cognition, ranging from
biological and experimental studies to formal analysis. Contributions from the
fields of psychology, neuroscience, linguistics, computer science, mathematics,
ethology and philosophy are welcome in this journal provided that they have some
bearing on the functioning of the mind. (http://www.journals.elsevier.com/cognition/#description)
이러한 검색을 한 후에 제가 다음에 무었을 했는가 하면, 제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였던
‘인지’의 정의를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인터넷 자료(백과서전 등)은 Neisser 교수가 표현한
“The term "cognition" refers to all processes by
which the sensory input is transformed, reduced, elaborated, stored, recovered,
and used.”에서
‘used’의 깊은 의미에 주의를 주지 않은 채, 주의, 감각, 지각, 기억, 언어, 사고
등의 지적인 과정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위키피디어의 정의가 다른 곳의 정의와 다른 점은 - 그것이 눈에 뜨였는데 - ‘인지’가
사람의 심적 과정과 상태뿐만 아니라, 집단, 조직, 자율적 기계, 인공지능 등의 지적 실체의 심적(mental) 과정과 상태까지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과연 ‘mental’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것인가가 반문됩니다.
-- ‘mental’을 ‘심리적’이나 ‘마음의’가
아니라 ‘정신의, 정신적’ 이라고 번역하는 국내 타 학문 전공자와 번역가들의 글을 볼 때 마다 부정적 느낌이 생기지만. 아직도 국내 병원이나
의학계통, 일반인, 매스컴에서는 ‘정신’이라는 이 용어를 계속사용하고 있지만, 과학적 심리학에서는 ‘정신’이라는 용어는, ‘영혼’이라는 용어처럼
비과학적인 구시대의 개념이라서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경험과학적 심리학 책이나 논문에서는 ‘정신’이라는 용어 사용이 금기시 되고 있습니다.)
그 객관적 지칭 대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칭 대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마치
아는 듯이 통용되는 개념들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는 많습니다. 서구 과학에서도 그런 개념들을 과학에서 몰아내려는 작업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
하여간, 다시금 ‘mental’의 어원인 ‘mind’, ‘마음’이 무엇인가, ‘인지’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는 체화된 마음(또는 체화된 인지;
Embodied Mind; Embodied Cognition)의 패러다임이나 동역학체계(dynamic systems) 패러다임을 연결하여
생각하자면 - 특히 요즈음의 인간 마음의 작용과 인공물의 지능(마음)의 작용이 (심리철학적 이유로, 둘이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아주 근접하는
추세를 본다면 - 마음이 무엇인가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마음’ 개념에 이미 ‘몸’ 개념이 전제(포함)되어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여
왔다고 하는데 (관련 서적: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http://blog.daum.net/fushanai/4754960),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http://www.yes24.com/24/goods/3639457?scode=032&OzSrank=4)), 마음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지, ‘인지’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지 ‘번뇌’하게 됩니다
(‘번뇌’라는 용어도 상당히 유물론적 마음 관점의 용어이군요!).
‘마음’ 개념을 규정하기에는 위의 책들이 논의한 것을 보자면, 그리고 저의 지식이 일천함을
고려한다면 아주 어려운 과제이고요, 오늘은 잠정적으로, 오늘의 시점에서의 ‘인지’에 대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엮어 보고 마무리하려
합니다.
첫째로, 저는 ‘인지’를 사고 등의 지적인 과정으로 보는 좁은 의미의 ‘인지’ 개념 사용에
강하게 반발합니다. 인지심리학의 영역을 규정하여 열고 최근에 작고한 Neisser 교수의 ‘인지’ 개념이 이미 그러한 좁은 의미를 넘어서서
있습니다(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cognition is
involved in everything a human being might possibly
do;
that every psychological phenomenon is a cognitive
phenomenon’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로, (1) 몸, 환경과 하나 되어 통일된 한 단위를 이루어 작동하는 ‘마음’ 관점인
‘체화된 인지’ 관점과, (2) 또 미래 새로운 개념으로 재구성된 휴머니티(humanity)의 사회에서는 미래 인공물(artifacts -
현재의 각종 디지털 기기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현실세계 + 가상세계들의 발전된 미래 상태 포함)의 지능과 경험이 인간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에
근접하여 가고 있음을 주장하여 온 제가, 생각하는 ‘인지’란 단순히 인간적 사고 등의 지적 과정을 뜻하는 좁은 의미의 ‘인지’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정서적(affective), 신체적 과정들의 작용을 촉발하고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개념화 되어야 마땅하지요. 인간의 집단적 조직이나
기관들, 그리고 인공물들에서 가능하여지는 삶의, 경험의 과정과 상태들도(현재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상상 불가능한 미래 가능 상태들도) 포함되어야
하고요.
셋째로, 제가 1930년대에서 50년대 60년대까지의 마음-기계 연결 역사를 추적하여
보니까, 그 당시에 기존 과학 전통의 ‘에너지’ 개념 중심의 과학으로부터 이를 대체하여 ‘정보’ 개념 중심의 과학기술 시대를 (당연히 오늘날과
미래의 인류 디지털 문화의 개념적 기초를 그 당시에) 이끌어 낸 ‘지적 흥분의(intellectual excitement)’, 과학 패러다임
변혁의 시대를 주도하며 그 한 가운데에서 살다 간 학자들 -
이 분들이 저는 제일 부럽습니다. 한 삶에서 그런 새 지적 패러다임 생성의 지적 흥분의 소용돌이(사와, 思渦) 분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그 일원으로 사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 의 이론, 개념,
상호작용들을 추적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제시한 개념들이 오늘날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단순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제시한 개념 중의 하나인 ‘정보,
information’ 개념에는 단순 데이타의 개념을 넘어서, 지식, 시스템, 신호, 의미, 생명,
목표, 목적, 마음, 기계, 뇌, 언어, 계산, 커뮤니케이션, 사회, 삶의 역동 등의 여러 개념들이 모두 연결되어서 생각되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학자들이 자기 전공분야의 학자이면서 동시에 그 나름대로의 이론을 지닌 철학자이었기도 하였으며, 50-80여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한국 과학기술 및 기업계에서 첨단 화두로 되고 있는 학문간(인문-사회-자연-과학-예술 + 기업) 융합에의 추구를 이미 그 당시에 적극적으로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떠 밀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적 추구의 자연적 과정으로써) 이루어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이버네틱스, 인지과학, 인공지능 등의 영역을 열은 20세기 초, 중엽의 학자들의 개념이나
이론들을 보면, 그들이 ‘정보’ 개념을 이야기 하면서 bit 수를 사용한 좁은 의미가 아니라 인간-동물-기계 시스템들, 그들의 삶(생명,
활동)의 목표, 목적, 의미 등을 연결하여 큰 틀에서 생각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문화를 뒤바꾼 기초개념인 튜링기계 이론이나 이들이
생각한 바를 추적하여 가다보면, 자신의 지적 왜소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더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가를
깨달음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그래서, ‘인지’에 대한 결론은?
저는 ‘인지’를 ‘환경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넓은 의미의) 마음과
(그의 표현인) 행동이 짓는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마음’ 개념에는 기계나 다른(사회 조직, SNS는 물론 기타 사회문화적
소프트 시스템 등 포함) 인공물의, ‘의미가 담긴’ 활동들도 포함됩니다.
그렇게 정의한다면 자연스레 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인지”가 인간 및 인공물의
활동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인지과학과 심리학의 관계는?’, ‘인지과학과 사회과학의 관계는?’ 하는
반문이요.
이에 대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 편향되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 말하고
싶습니다.
“반세기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가 해체되며 그 많은 영역을 인지과학에 내주었듯이, 미래의
학문(과학) 체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게 재편되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중세 이후의 제반 학문(과 과학)의 생성과 분화, 변천 역사를 생각하여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에서는 시와 문학은 마음의 내러티브적 특성상 인지문학으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
고대로부터 인류 생각을 지배하였던 신학은 인지신학과 신경신학으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 언어 관련 학문들은 인지언어(언어인지)학을 매개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 사회과학의 꽃이라던 경제학은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신경경제학으로,/ 법학은 법인지과학으로,/ 정치학은
인지정치학으로,/ 커뮤니케이션학은 인지커뮤니케이션으로,/ 교육학은 인지-학습과학을 통하여,/ 경영학은 인지경영학 및 신경경영학으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자연과학의 생물학은 진화심리학과 인지생물학, 인지신경과학으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물리학은 인간의 의식현상과 사회현상을 복잡계
현상으로 개념화하며 동역학체계를 매개로 인지과학과 연결되었으며,/ 공학의 인공지능은 그 영역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등장한 인공인지시스템 영역을
통하여,/ 로보틱스는 인지로보틱스 등의 영역을 통하여,/ 디자인관련 공학과 기타 공학 등은 인간공학, HCI를 거쳐서 HCI, UX, BCI,
인지디자인, 인지인포마틱스(cognitive informatics) 등의 영역을 통하여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의학은 인지의학, 인지신경과학
등을 통하여 인지과학과 연결되었고,/ 음악 미술 등은 인지음악학, 시각인지과학, 인지디자인, 신미디어 이론, 인지 퍼포만스 이론 등을 통하여
인지과학과 연결되어 있으며,/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여러 학문들과 그들의 응용적 적용의 현장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빚는 현상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 현상의 탐구를 심리학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는 어떤 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과 그것이 빚는 각종 현상은 여러 관련 학문(과학)들이 연결, 접근되어 그 다양한
측면들이 규명되어야 하고 또 이들을 잇는 융합적 지적 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 어떤 시점에서 (21세기 후반이 될지, 22세기가 될지 모르지만) 현존 학문
체제의 (특히 인문, 사회,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의 한국 과학기술계가 그리 신성시하여온 체제의) 전면적 재편성, 재구성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지적 흥분의 시기에 현장에 있지 못하고 미리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쉽고 그 때의 소용돌이에 현장에 있을 지적
후대들이 마냥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사이버네틱스처럼 슬며시 심리학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해체되며 그 주제들이 인지과학으로
포함될지, 아니면 그 반대의 역 현상이 일어날지, 인지과학(아니면 심리학 또는 인간학?)이 인간, 사회와 문화, 뇌, 기계를 포함한 각종
인공물의 여러 현상을 포괄하는 종합적 학문으로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를 흡수할지 아니면 그 반대현상으로 인지과학이 해체될지. 미래 22세기 초엽의
인지과학, 어떤 모습, 어떤 위치일까?
자못 궁금하여 집니다.
이미 제1의 르네상스는 14세기 말부터 이태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1의 계몽(개화)시대는 17세기에 서구에서 이루어졌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가능하여 진 디지털 문화 변혁은
제2의 르네상스 또는 제2의 계몽(개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21세기 중반이 될지 22세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3의 르네상스
또는 제3의 계몽시대(개화시대)가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그 시점을 위하여 한국 과학기술계가 장기적 미래 안목을 도출하여 미리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이미 60 여 년 전에 20세기, 21세기의 인류 디지털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론과
개념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학자들의 왕성한 상호작용의 소용돌이에 의하여 도출되고 교환되며 널리 퍼져 인류문화가 완전히 뒤바꾸게 된 변혁의, 저 먼
뒤안길에 서서, 일제가 전하여 준 습관적 전통 과학개념에 젖어서, 반세기가 지나도록 과연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무엇이 일어났었고 그것이 인류
및 한국의 미래 사회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대처하지도 못했던 한국 사회의 잘못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새 휴머니티 개념과 넓은 ‘인지’ 개념에 바탕을 두는 그 제3의 르네상스, 제3의
계몽시대(개화시대)의 지적 흥분 분위기에 한 가운데에 있을 여러 분을 부러워하며 응원합니다.
2012년 6월 6일 아침
ⓒ2010, Jung-Mo Lee: 이 파일은
개인공부용으로 다운받거나 나르셔도 좋습니다. 상용목적으로는 이용 불가함.
|
Search This Blog
Showing posts with label 인지.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인지. Show all posts
Thursday, August 2, 2012
The concept of COGNITION; A thought by a first generation Cognitive scientist / (text in Korean)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s? A Cognitive Science Approach looking for the Convergence across Humanities, Social Sciences, Natural Sciences, and Technologies. / (text in Korean)
작년 (2011) 여름에 한국전자통신연구소 (ETRI)의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시인들이 만들어 내는 계간지 [시와 반시]에 글을 쓰게 되어서
작심하고 문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아래 연결된 파일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작심하고 문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아래 연결된 파일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2012년 5월 18일의 성균관대 인문학연구소 [융합심포지엄]에 참석하여서 들어
보니,
인문학에서 문학과 뇌과학의 융합 또는 융화 또는 수렴의 문제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문학이 과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한 인지과학도는 어떻게 생각할 수도 있는가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 아래에 관련 파일 목차와 함께 그 글의 링크를 다시
올려 봅니다.
----------------------------------------------------------------
---------------------------------------------------------------------------------------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s? A Cognitive Science Approach looking for the Convergence across Humanities, Social Sciences, Natural Sciences, and Technologies. / (text in Korean)
- by Jung-Mo Lee (Sungkyunkwan University, Korea)
- Quarterly [The Poetry and Anti-Poetry], 2011, Fall, Vol. 77, pp. 198-211.
[Contents]
1. Brain Science and its Disciplines.
2. Cognitivism and Cognitive Science.
3. Questions on the current Brain Science Culture (Fad).
4.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s: (I).
5.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s: (II): the Embodied Cognition Paradigm.
6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s: (III): the Narrative Mind.
7. A new Convergence: Cognitive Science and Literature.
Key Words: brain, brain science culture, cognitive science, embodied cognition, narrative approach, literature and cognition, convergence, 융합과학기술, 인지과학, 체화된 인지, 심리학
---------------------------------------------------------------------------------------
뇌과학을 넘자면? :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의 연결점인 인지과학의 새 틀
-이정모-
-계간지 [시와 반시], 2011, 가을, 77호, 198-211쪽.
1. 뇌과학과 주변 학문들
이전에는 해부학 중심이던 신경과학이 20 세기 후반에 뇌영상기법 등의 방법론의 개척에 의해 뇌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연구 방식을 재구성하면서 뇌연구 결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로 뇌과학이 과학의 총아로 떠올랐고, 뇌과학의 연결 성과와 가능성에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뇌과학이 일반인의 지적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뇌의 해부학적 측면이나 유전학적 생물적 기반보다는 뇌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 성과 때문이었다. 일반인이 관심을 가지는 뇌의 그 기능은 실상은 뇌의 심적(인지) 기능이다.
그러한 면에서 뇌과학이 각광을 받는 까닭은 사실은 뇌와 마음의 연결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뇌과학 이외에도 인지과학, 인지신경과학 등이 있다. 현재 추세로는 이들 학문간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 서로 중첩되는 분야가 많으며 연구자 자신도 자신의 연구가 어떤 분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미국 대학들에서 뇌과학 학과도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명시적으로 인지과학 연구를 표방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MIT 등에서와 같이 ‘뇌 및 인지과학 학과’가 학과의 공식적 이름인 것은 이러한 학문적 경계의 애매성과 뇌과학이 인지과학적 연결이 없으면 공허한 것임을 잘 나타내어 준다.
각광을 받으며 떠오른지 20여년 밖에 안 된 뇌과학이 다른 학문들과 연결되어 많은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 내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현재(특히 국내에서는)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에 뇌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진전된다면 인간의 마음 작동의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입장이 일반인들이 지니는 생각이다. 이 글은 그러한 과다 단순화한 관점을 넘어서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2. 인지주의 틀: 형성과 인지과학
뇌과학의 형성과 발전의 전파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20세기에 인류문화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인지주의’ 틀의 형성이라고 하겠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기에 머물던 고전적 계산기가 인지주의 틀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의 지능적 컴퓨터로 재개념화되어 새 세상이 열렸다. 생명체인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만든 인공물의 하나인 컴퓨터가, 본질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동류의 시스템이라는 발상의 대 전환으로 인하여 인류 문화에서 컴퓨터 시대, 디지털 문화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인터넷 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디지털컴퓨터가 모두 상징(기호)을 조작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라고 보는 관점을 정립한 이러한 인지주의 틀의 출현을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과학혁명, 곧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를 최초로 연구하여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인 스페리(R. Sperry)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지주의의 등장은 하나의 「과학혁명」이었고, 과거의 물리학 중심의 전통적 과학에서처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결정된다는 상향적 입장이, 인지주의 과학혁명에 의하여 하향적 입장과 조합하여 ‘이중 방향’, ‘이중 결정’ 모형으로 과학이 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과학관과 세계관이 급진적으로 수정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인지과학과 여러 테크놀로지(특히 인공물과 인간의 상호작용 관련 기술)의 수렴, 융합은 또 다른 미래 가능성들을 시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1세기는 ‘국제화시대’가 아니라 ‘인지시대(the Cognitive Age)’라는 선언적 칼럼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넓게 본다면 인지과학은 뇌과학을 그 하위 구성영역의 하나로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본다면 뇌과학을 인지과학과 차별화 하여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뇌과학 탐구 주제에서 인지 기능을 제외하여야 하고, 그렇게 되어 남는 뇌과학은 별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른 대안으로 신경과학자들의 일부가 주장하듯이 인지과학은 신경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인지과학은 신경과학 또는 생물학의 하위 학문이 되는데, 이것은 곧 ‘의미’란 신경적 활동 이상의 것이 아니다 라는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귀착된다. 이 관점은 인지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수용되기 힘든 입장이다.
3. 뇌과학 지상주의에 대한 반문
21세기의 둘째 10년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은 과연 어떤 시점일까? 인류 문화, 뇌과학을 비롯한 과학과 유전공학, 아이폰 등의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인간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의 정립이 요청되는 시점일까?
우리는,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심적 현상을 뇌의 신경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뇌과학의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현재에는 뇌과학 연구가 갓 출발하여 진행되는 단계이어서 모든 것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뇌과학 연구가 충분히 발전하고 진행된다면 인간사의 모든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뇌과학의 신경과정 작용의 환원주의적 원리에 의해 이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틀이 일반인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신경과학자들, 과학학술지, 매스컴이 ‘뇌는 곧 마음(mind)이다’ 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뇌 연구 결과 하나 하나에 대하여 매료되어 뇌 지상주의에 매어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마음은, 의식은 뇌의 신경적 활동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신경과학자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에는 어떤 잘못이 있을까? 뇌에 대한, 신경과학에 대한 나의, 우리의 매료됨이 과연 21세기 내내, 그리고 22세기와 그 후의 미래에도 지속될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뇌과학적 발견과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의 변화에 내가 뒤지지 않고 따라가기 위하여, 그리고 21세기 후반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생각의 틀을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까?
4. 뇌과학을 넘어서 1:
지금 21세기 초엽 현재, 지성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그리고 무시 못 할 중요한 생각틀의 변화의 하나는, 바로 ‘나의 의식(마음)’은, 나의 몸 더 좁게는 ‘나의 뇌’에 의해 ‘나’가 아닌 것과 구별될수 있다는, 즉 ‘나는 나의 뇌다’라는 식의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마음, 의식을 밖으로 ‘확장시켜서, 뇌-몸-환경을 하나의 불가분의 총체적 단위로 이해하려는 스피노자 식, 메를로퐁티 식의 생각이 전개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을 동물과 연속선상에 있는 하나의 자동기계로 생각하며,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몸을 동물적기계로 보았고, 마음과 영혼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음은 사고하는 실체이나 외연을 지니지(공간을 점하고 있지) 않는 반면, 몸은 공간에서 기하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외연을 지닌 실체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수정론적인 입장이 이후에 있었으나, 서구의 문화사에서는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적 입장이 지배하여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신경과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마음을 뇌의 신경적 활동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일원론(마음=뇌)적 관점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기는 하였으나, 정신(마음)과 물질을 대립적으로 보는, 또는 생각의 주체와 그 대상이 되는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데카르트식 존재론의 관점은 아직도 현재의 신경과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뇌 = 마음’, ‘마음 = 뇌’, ‘의식 =뇌’ 라는 단순한 과학적 믿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움직임이 철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태동하고 있고, 이러한 ‘마음’ 개념의 재구성의 추세가 더욱 확산된다면 단순히 철학,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과학 전반, 그리고 인공지능, 로보틱스, 다른 인간관련 공학 등에 강한,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특히 로보틱스의 연구에는 가장 강한,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된다.
저명한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 데이빗 찰머스 등이 이러한 발상의 전환 중심에 서 있으며, 여러 학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물론 강한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구호의 핵심은 ‘데카르트를 넘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마음)과 물질(신체),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구별한 데카르트 식의 존재론의 개념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현재 신경과학의 한 부분인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관점이(그러나 신경과학자라고 하여 모두 환원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활동을 왜곡하여 이해, 접근, 탐구하게 되고,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철학자들의 일부가 늘 그렇게 이야기하여 오던 이야기이기에, 또 철학자들이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지 못할 이유는 이러한 논의를 최근에 다시 전개하도록 촉발시킨 사람들이 철학자가 아닌 인공지능학자, 로보틱스 연구자,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MIT대학의 미디어랩의 중심연구자였던 로드니 브룩스 교수는 인공지능, 로봇 등을 연구하던 중에, 과거의 데카르트 식의(고전적 인지과학) 인공지능이나 로봇시스템 이론으로서는 제대로 된 인공지능시스템이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스템들에 내장된 프로그램과 몸-환경이 밀접히 연결된 새로운 개념화가 필요함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이에 다른 인공지능 연구자, 로보틱스 연구자들이 점차 공감하였다.
공학자들의 이러한 강한 이의 제기에 힘을 얻은 철학자들은 과거의 현상학적 철학 전통에서 이야기하던 개념들을 다시 꺼내어 되생각하고 가다듬어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몸-환경-활동의 중요성을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생각들에 현재까지 진행된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동물행태학, 인류학, 로보틱스 등에 대한 연구를 연결하여 마음, 의식, 존재 개념들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재구성의 결과로, 마음은, 의식은, ‘뇌를 넘어서’ 개념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알바노에의 「뇌과학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바를 인용하자면, ‘마음, 의식, 나 = 나의 뇌(의 활동)’ 이라는 데카르트 식의, 신경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거대한 착각’에서 이제는 우리가 빠져 나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자연과학을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적 재개념화 도움에 의하여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뇌는 마음과 같지 않다’, ‘마음(의식)은 뇌와 몸, 그리고 환경(다른 인간과의 관계 포함)의 상호작용 활동에 의존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몸과 환경을 빼놓고 뇌가 곧 마음이다 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유기체의 삶은 (뇌의) 내부에 있지 않다’, ‘세계는 뇌 안에 만들어지거나 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환경과의 행위적 활동) 관계에서 (비로소) 생긴다’, ‘뇌 혼자서 무엇을 이룰 수 없기에, 실상 모든 「의미」는 머릿속에 없다’, ‘우리의 경험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뇌 자체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환경)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 (행위, 활동) 관계다’,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가 의식의 자리라는 신경과학자의 경솔한 확신, 착각’, ‘우리가 우리의 뇌의 신경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집에서 실험대로 가져온 선입견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 일반인, 매스컴 등 우리 모두가 빠져있는 이러한 (뇌과학적) 거대한 착각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포기하고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거대한 착각을 벗어나서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체화적 인지’ 또는 ‘확장된 마음’의 틀로 지금 인지과학의 대안적 관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5. 뇌과학을 넘어서 2: 체화적 인지 틀의 형성
인간의 마음에 컴퓨터 메타포를 적용하여 1950년대에 출발한 인지과학은, 이후 1980년대에 뇌 메타포를 적용하여 연결주의와 신경과학(뇌과학)을 발전시킨 이후,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또 다른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 변화의 틀은 위에서 언급된 탈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움직임이다. 최근에 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또는 확장된(물리적 공간에 연장된) 마음: Extended Mind))'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존재론의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 관점이나, 그 반대인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일원론 관점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이다.
이 틀은 인간의 마음, 인지가 개인 내의 뇌 속에 추상적 언어적 명제 형태로 표상된 내용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몸을 가지고(embodied) 환경에 구현, 내재되어(embedded) 사회문화환경에 적응하는 (몸이 있는) 유기체가 ‘환경’과의 순간 순간적 상호작용 행위 역동 상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즉 몸과, 문화, 역사, 사회의 맥락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되는 그러한 ‘역동적 활동’으로서의 마음임을 강조하는 접근이다. 이 ‘체화된 인지’의 보는 틀은 고전적 인지주의의 정보처리 접근이 지니는 제한점을 벗어나려 한다. 즉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한 개인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인지적 표상이나 정보처리가(고전적 인지주의 입장) 아니라, 몸으로 환경 속에 구체화되며, 몸의 활동을 통하여 환경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로서 마음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리고 환경의 다른 인간의 마음이나 각종 인공물에 분산표상된 마음,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상황 지워지며 행위로 구성되는 마음으로서 보려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의 심적 상호작용의 실제는 몸에 의존한다. 따라서 감각운동적 바탕이 마음의 핵심이 되며, 고차 심적 기능도 이러한 기초의 제약과 허용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각은 능동적이며, 행위는 지각에 의해 인도되며, 신경계, 몸, 환경 요인이 실시간 상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이해함을 통하여 과학적 설명이 주어진다. 최상위의 매스터라고 하는 뇌에 의한 전반적 계획이나 통제가 없이도, 분산된 단위들의 지엽적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가조직적(autopoietic)으로, 창발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 심적 현상이다. 마음은 환경에 확장된, 상황지어진 것으로 분석, 이해되어야 하며, 자연적, 생태적 상황에서 맥락이 고려되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통적 논리적 형식적 접근보다는 환경과의 역동적 시간 경과와 상호작용성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역동적 접근을 통하여 탐구되어야 하며, 현상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체험되는가 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도 설명적 요소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마음이 이루어내는 ‘의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할 수 있다.
즉, [1] ‘뇌’를 포함하는 ‘몸’과, [2] ‘환경’(각종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과, [3] 그리고 이 둘이 연결되는 상호작용적 활동(interactivity)의 세 측면이 서로 괴리되지 않고, 하나의 역동적 전체로서 개념화되는 그러한 접근을 하여야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듯이 ‘몸’이라는 전체도 아닌, 한 부분적 실체인 ‘뇌’에서 마음의 모든 것이 일어나며, 환경과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에 연원을 둔 이러한 개념적 변혁에의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마음과 몸에 대한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심신이원론이나,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뇌과학자들이 지니는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환원주의적 일원론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의 펼침이다. 이 체화된 인지 접근은 고전적 인지주의에서 배제되었던 ‘몸’을 마음의 바탕으로 되찾게 하며, 몸을 지닌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환경’을 인지과학과 심리학에 되살려 놓게 하며, 공간적 연장이 없었던 추상적 ‘정신적 실체’라는 마음이 아니라 ‘몸을 통해 환경에 연장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으로 마음 개념을 재개념화 할 가능성을, 아니 그래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개념을 이렇게 ‘뇌를 넘어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는 실체의 개념으로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재구성의 틀은 심리학, 인지과학의 기초적 이론 틀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 등), 테크놀로지(로보틱스 등), 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적, 응용적 틀의 재구성에 (뇌과학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상당한 시사를 지니게 된다.
이 ‘체화된 인지’ 틀이 떠오르기 이전에 이미 인지과학의 틀을 도입하여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었다. 학문간 수렴, 융합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인지정치학,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신경경제학, 행동법학, 인지법학, 신경법학, 학습과학 등의 새 분야들의 떠오름이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그러한 분야들에서 뇌의 신경적 현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개념화하려던 시도들의 편협한 한계를 넘어서, ‘체화적 인지’의 틀을 도입하여 인간과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미래 사회과학의 과제로 남는다.
공학의 분야들 중에는 처음부터 인지과학의 한 중심 분야이었던 인공지능 연구의 연결에 의하여 각종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나 디지털 기기의 디자인 분야들, 특히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어 왔다. 이러한 분야들에서 뇌과학 연구의 발전 결과와 그 시사를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연구 영역이나 뇌-로봇 인터페이스(BRI) 영역이 이러한 시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듯하면서도 문제점이 계속 남는다.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meaning)’를 습득, 창조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존재, 환경과 괴리되지 않고 하나되어 살아 움직이는 몸이 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의미를 지어내는’ 삶을 인공적으로 구현하기 힘들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체화된 인지’ 틀은 여러 가지 새로운 개념적 재구성을 시사한다. 예술의 분야에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채, 몸을 통해 구현되는 마음’의 관점은 문학, 음악, 미술, 공연 등의 분야에서 여러 새로운 개념적 구성 작업을 가능하게 된다. ‘뉴 미디어 이론’에 새 인지과학적 틀이 깊숙이 관여되는 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의 분야는 이를 넘어서 또 다른 개념적 재구성이 요청된다. 즉 내러티브의, 이야기의 문제이다.
6. 뇌과학을 넘어서기 3: 내러티브적 마음
인문학자 마크 터너 교수는 “문학적 마음”이라는 책에서 ‘인지과학의 중심 주제가 사실상 문학적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음의 기본 원리이다’ 라고 하였다. 로이드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에 의하면 내러티브란 인간 마음의 기본적, 일차적 작동 원리이다. 인지과학 출발의 기틀을 닦은 심리학자 브루너(J. Bruner)는 의미 만들기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며, ‘의미’라는 것은 ‘상징(기호)과 그 지시대상’에 의해 정형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에 바탕을 둔 ‘내러티브적 해석’에 의해 매개되고 조정되고 또 재조정되어서 그 맥락적, 개인적 다양성이 살려지고 그 문화적 체계 내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석 틀에 의해서 비로서 생성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넓게 해석하자면, 의미란 문화공동체의 환경에서 부여되는 역동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이며 내러티브적인 것이지, 환경과 별개의 독립적 실체로 개념화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과정이라는 하드웨어적인 것 그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다양하고 수용자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현상적, 심리적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가 아침부터 밤까지(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열심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이야기’적 의미를 양산하여 내는 그러한 존재이고, [마음의 본질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 생산 공장’]이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인간적 존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란 한 인간이 몸을 통해 환경에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서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체험적으로 엮어 내는 이야기적, 내러티브적 해석이 바탕이 되는 의미이다.
이는 비록 환경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정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는 되지만, ‘뇌를 넘어서’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역사와 문화와 개인적 일화들이 엮여져 짜여지는 문화적 의미의 체계이다. 사회문화적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생물학적 그 무엇이다. 뇌과학의 신경적 과정 현상으로만은 도저히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인지적 산물이다.
인지과학에 내러티브적 접근의 도입이 필연적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결정적 산물이며 또한 인간 마음 활동인, 문학을 인지과학에서 연결하여 탐구하여야 하는 것이 요청될 것이다.
7. 맺는 말: 인지과학과 문학
인지과학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기술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들의 문학활동과 독자의 심적활동이 인지과학에서 논하는 언어이해와 마음이론의 적용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생각할 것일까에 대해 저자가 나름대로 생각하여, 즉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저자의 마음이론에 바탕을 두고, 저자 자신의 생각을 상징으로, 표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읽으면서 독자는 자기의 기억에서 ‘이야기(내러티브)적 원리’ 지식과 각종 세상사 관련 지식을 동원하여 그 상징 표상을 정보처리하고 해석하여 이해하고 그것이 정서적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감흥을 갖게 된다. 문학작품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저자의 글 표현은 독자가 독자 자신의 기억에서 어떠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야기적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기호적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이 해석과 구성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지(정서를 포함한) 과정이며, 인지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과거의 문학(비평)이론들로서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 등의 입장들이 있었다. 이 틀이 20세기 말에 무너지고, 이제는 문학의 내용 전개나 예술을 자연주의에, 진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거나 인지이론에 의거하여 이해 및 분석하고, 비평하고, 기술하려는 입장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기존의 문학(비평) 이론은 주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만 강조하였지, 그러한 문학활동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인지적 측면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 결과가 지니는 시사점을 무시하였다. 실제의 인간은 진화역사적으로 변화/발달한 몸을 지닌 생물체인데, 과거의 문학은(적어도 문학비평이론) 이러한 문학적 산물을 내어놓고 또 이해하는 인간이 자연의 존재라는 ‘자연 범주’ 특성을 무시하여 왔다. 과거의 문학비평 이론은 문학작품, 예술 등과 관련된 인간 마음의 ‘자연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숨겨진 복잡성」에 대하여 학문적 인식, 과학적 지향함의 수용이 없었다(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아니, 실제의 예술작품 생성 작업 현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나, 문학(비평)이론가들은 문학이론 구성에서 이러한 부면을 무시하여 왔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인간 삶에서 무엇을 위하여 생겨났는가, 문학활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개개의 문학작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들이 진화이론적 관점에서,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앞으로 문학과 인지과학의 연결분야가 인지과학의 응용분야로서 발전될 뿐 아니라, 이 분야가 발전되면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상위수준의 인지과학 이론틀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인지과학적 연구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자체도 문학과 연결됨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보다 거시적인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전개할 수 있음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이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의 작동원리가 본질적으로 ‘내러티브 엮기이다’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제, 인지과학을 위하여서, 그리고 문학을 위해서라도 문학과 인지과학이 연결, 수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의 상위범주인 인문학이 인지과학과 연결되어야 한다. 인지과학과 문학을 연결하는 연결점에서 ‘내러티브적 이야기에 바탕을 둔 인문학’과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인 인지과학이 수렴-융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드웨어적 작동 원리를 밝히는 뇌과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뇌과학은 인간의 의미있는 미래를 위하여 필요조건일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뇌과학 지상주의의 거대한 착각을 넘어서야 한다.
----------------
약력 ; About the Author
이정모 : 심리학자. 성균관대 심리학과 및 인지과학협동과정 명예교수. 한국실험및인지심리학회 회장, 한국인지과학회 회장 역임. 저서『인지과학: 학문 간 융합의 원리와 실제』『인지과학: 과거, 현재, 미래』『인지심리학: 형성사, 개념적 기초, 조망』, 공저 『언어심리학』『인지심리학』등.
Saturday, May 19, 2012
인간 삶에서의 음악의 역할
* 2008년 3월 경에 만든 파일이다.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기에 이 파일 만들 때에 참고한 책이나 자료들의 정확한 목록이 생각나지 않음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인간 삶에서의 음악의 역할
- 이정모(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음악의 뿌리
음악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음악이 없는 일상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좋아하는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음악 파일을 다운받아 이동하면서, 혹은 활동 공간에서 듣기도 한다. 식당, 카페, 서점, 백화점, 어디를 가더라도 대부분 음악을 틀어 놓는다. 또한 음악이 전혀 없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심지어 뉴스가 시작할 때와 끝날 때에도 음악은 나오니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가족 모임, 직장 회식, 친구들 모임, 생일파티, 무슨 무슨 기념일까지 때와 장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노래방은 단골 코스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음악은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이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하다니, 인간에게 음악이 필요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저 ‘좋다’ 정도를 넘어서 어떠한 다른 이유가 분명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음악은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의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됐을까? 인간이 진화할 때 음악은 어떠한 도움이 되어서 계속 발전해 왔을까? 혹 인간 말고 다른 동물들도 음악을 즐기거나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동물의 음악과 인간의 음악은 얼마나 비슷할까?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언제 음악이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본다면, 화석을 분석하여 직관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방법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동물이나 인간이 노래할 때 소리를 내는 기관인 울림관 등이 그대로 화석으로 남아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보다는 동물과 인간의 음악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방법이 더 적절해 보인다. 진화 음악학이나 생명 음악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서는 동물 행태를 비교 분석하여 음악의 기원을 탐구한다. 또한, 인간 뇌에는 기나긴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뇌의 여러 층들이 갖고 있는 음악 관련 기능을 분석하여 음악과 진화의 관계에 접근하기도 한다.
음악의 진화적 뿌리에 대하여는 상당히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울대 음악대학의 이석원 교수가 이 주제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여 왔으며, 현재 널리 알려진 “음악의 진화”라는 영문 자료를 웹에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뇌의 신경과정, 그리고 음악의 진화를 연결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책이라든가 《음악의 왈츠》 같은 책도 있다. 음악은 도대체 어떠한 목적으로 진화되었는가에 대하여 여러 이론이 있다. 그중에서 음악이 적응이라는 기능 때문에 진화하였다는 이론이 있고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있다.
동물은 왜 노래할까?
음악을 그저 문화의 산물로 보지 않고,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쓰임이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하게 된 출발점은 다윈이었다. 다윈은 음악이 동물이나 인간이 짝짓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기능이 발달됐다는 성 선택 이론을 내어 놓았다. 동물은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음악의 원초적 형태인 소리를 사용하였고, 인간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리듬과 소리의 높낮이 변화가 있는 원초적인 음악의 형태를 사용하였으리라는 주장이다.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진화의 과정에서 음악이 발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에 다른 동물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즉 삶의 공간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음악이 발달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노래하는 새나 흑고래, 긴팔원숭이 등을 관찰해 보면, 이러한 성 선택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암컷들은 다양한 레퍼토리로 노래를 부르는 수컷, 복잡한 노래를 정교하게 부르는 수컷을 짝으로 선택하였다. 그러한 새는 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소리가 작은 수컷보다는 큰 수컷을 선택했는데, 소리가 크면 아무래도 몸집도 크고, 그러한 유전자가 번식에 도움이 되리라고 암컷이 판단한 것이리라. 다른 실험에서는, 노래를 안 하는 암컷 새에게 남성 호르몬을 투여하자 그 암컷 새가 노래를 하게 됨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역시 노래가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의 중요한 수단임을 보여 주는 실험이다.
노랫소리와 관련된 기관에 변화를 주어서 음악과 짝짓기의 관계를 살펴본 실험도 있다. 수컷 새는 울대의 공기주머니를 이용해 소리를 낸다. 그런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내어서 제대로 노랫소리가 나지 않게 하자 수컷이 짝짓기를 잘 못하더니, 실험자가 다시 그 구멍을 막아 주자 짝짓기에 잘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랫소리를 제대로 못 낼 때는 다른 새가 그 수컷의 영역을 쉽게 침범하더니, 그 구멍을 다시 막아 주자 침입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실험 역시 짝짓기와 영역 보호를 위해 음악이 발달하게 됐다는 이론을 잘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수컷 울새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원래 살던 영역에 다른 새가 침입하는 횟수가 늘고, 침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아짐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커로 노랫소리가 들리게 해 놓자, 다른 새의 침입 횟수도 줄어들고 침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더 길어졌다. 이 실험 역시 동물의 노래가 영역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화하는 과정에서 음악이 발달해 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인간도 짝짓기를 위해 노래한다
조프리 밀러라는 인지심리학자는 음악이 성 선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지지하면서, 인간 역시 성 선택을 위해 진화의 과정에서 음악을 발전시켜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 한 예로 남성 록 스타들이 여성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가 섹스 파트너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를 들었다.
원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사냥이나 수렵 채집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음을 보여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음악과 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오늘날 일부 원시 부족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에는 사냥을 나가기 전이나 사냥이 끝나고 나면 노래와 악기 연주, 춤이 한데 어우러진 집단 행사가 있었다. 이때 음악과 춤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수렵이나 채집에서 재빠르게 음식물을 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터이다. 즉, 음악과 춤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신경 안 쓰고 음악이나 춤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음식을 많이 갖고 있거나 안전한 거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음악과 춤이 발달하고 점점 더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자,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재빠르기만 해서는 음악과 춤을 잘하기 어려워졌다. 영리함, 창의성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음악과 춤뿐만 아니라 생존경쟁에서도 점점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영리함이나 창의성 같은 지적 능력이 중요하게 되었다. 결국, 음악이나 춤이 이러한 지적 능력을 파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 근사한 음악이나 춤을 보이는 사람이 더 창조적이며 꾀가 있어서 더 잘 음식을 구해 오고 가족을 보호한다고 여겨지고, 이성에게 더 잘 선택되었으리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밀러는 가임 주기(월경 주기 가운데 임신이 가능한 때)에 있는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짝을 선택하는 경향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가임 주기에 있는 여성들이 창조성이 높은 남성을 짝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좀 더 높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경향성일 뿐,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언제나 이성에게 매력적이거나 가장 멋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베토벤 같은 위대한 음악가는 평생 결혼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치즈케이크와 같은 음악
한편, 일본의 하지메 후크이는 음악이 성적 충동을 높여서 자손 번식에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적 활동에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메 후크이는 남녀 비율이 같은 70여 명의 집단에게 음악을 들려주면서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 분비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봤다. 그랬더니, 음악을 들려줄 때 남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 적어지고 여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 많아졌다. 테스토스테론은 얼굴의 수염, 굵은 목소리와 같은 남성적 특징 및 남성의 성 기관 발달에 꼭 필요한 호르몬이다. 즉, 음악을 들려주자 남자는 남성성이 적어지고, 여자는 여성성 대신 남성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결국, 남녀 모두 각자 성의 활동성, 성적 긴장 상태가 적어졌다. 성적 활동과 관련하여, 음악이 성적 충동을 높이는 역할 말고 다른 역할을 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음악은 성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다윈의 이론에 대해 단칼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빈 서판(The Blank Slate)]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은 타고난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킨 미국의 언어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이다. 음악과 진화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주장은 흔히 ‘음악의 치즈케이크 이론’이라고 불린다. 핑커에 따르면, 치즈케이크는 인류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치즈케이크는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나거나 아직까지 인류 사회에 남은 것이 아니다. 치즈케이크는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한 당분과 지방을 포함하고 있고, 당분과 지방을 섭취하는 효과 때문에 계속 인류 사회에 남게 된 것이다. 즉, 치즈케이크가 아니더라도, 당분과 지방을 포함하는 다른 어떤 음식물이라도 된다는 뜻이다.
음악도 이러한 치즈케이크와 마찬가지이다. 치즈케이크처럼 음악 역시, 이성을 취하는 데 더 도움이 되거나, 자손을 많이 퍼뜨리거나, 세상을 보다 잘 인식하고 대처하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하여 발달하게 된 산물이 아니다. 음악은 그저 우연하게 언어에서 파생되어서 생겨났다. 진화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음악 자체가 직접 적자생존에서 살아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음악은 생존에 중요한 다른 소리를 대신하는 언어나 다른 무엇이 작동하도록 하는 ‘단추’ 역할만 할 뿐이다. 따라서 인류 사회에서 음악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음악은 생존경쟁을 통한 진화 과정에서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어떤 인지과학자는 음악을 ‘진화의 기생충’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음악이 면역 기능을 좋게 한다?
음악을 오래 연구하여 온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다윈과도, 핑커와도 조금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핑커가 이야기하듯 음악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은 아니라는 뜻이다. 음악이 진화 과정에서 전혀 도움이 되는 활동이 아니라면,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음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든지 빨리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악기는 5만 년 이전에 나타났는데,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언어가 출현하거나 농업이 나타난 때보다 앞선 시기이다. 음악은 분명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 살던 시대 인류, 현대문명 속에 살고 있는 인류, 그리고 현대 문명을 접하지 못한 일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모두 그저 좀 더 이성을 잘 끌고, 종존 번식을 잘 하기 위해서 음악 활동을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음악 활동이 진화 과정 중에 도움이 되는 이유가 성 선택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음악은 인간이 형성한 집단사회 안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집단의 유대감과 응집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발달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정서적인 측면 말고, 살아남는 데 직접적인 효과가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배리 비트만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면서 작은 북을 치게 한 뒤, 혈액을 검사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랬더니 음악을 들으며 북을 친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암세포를 찾아 죽이는 면역세포들의 활동 수준이 증가했다. 비트만은 이러한 실험 결과를,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코티졸이라는 호르몬의 분비 수준을 낮추어 면역세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건을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음악이 스트레스-긴장을 풀게 해주고, 그에 따라 면역 기능이 활발하게 되어 인간이 더 오래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주장이다.
유대감이나 결집력 같은 정서적인 측면, 면역 활성화 같은 생물학적인 측면 외에도, 음악이 언어와 관련되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며 춤을 추는 활동은 발성 기관이나 귀의 미세한 근육 조절 능력을 발달시키고, 또한 소리의 패턴과 멜로디, 박자 등의 구조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음악 활동이 말소리 사이의 시간 간격 패턴과 추상적 문법 구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주장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음악 활동은 언어활동을 위한 신체적, 인지적 준비 훈련이 되고,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적응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태어나서 감각자극이 눈에서 오는지, 귀에서 오는지, 피부에서 오는지를 구별 못하는 아기에게 엄마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얼러 준다든지, 어린이가 옹알이를 한다든지 하는 것 역시 이러한 준비 활동, 적응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의 과제
최근에는 신경과학 분야에서도 음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소뇌의 신경 활동이 관심 분야이다. 소뇌는 진화 단계에서 대뇌의 우반구나 좌반구가 발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뇌 부위이고 파충류의 뇌(뇌간)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소뇌는 일반적으로 음악이건, 언어건, 신체 행동이건 간에 시간 조절을 담당하며, 신체의 여러 움직임을 연결, 조정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뇌의 좌반구가 손상되면 리듬을 지각하거나 생성하는 능력에 문제가 생기고, 우반구가 손상되면 멜로디 지각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소뇌가 정서에도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앞으로 많은 연구들, 즉 동물행동학, 고고학, 해부학, 인지신경생물학, 발달심리학, 음악인류학, 인지심리학, 발달심리학 등의 연구 등이 수렴되어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이러한 탐색에서 인간의 뇌 연구와 동물행동의 비교연구, 문화인류학적 연구가 더욱 중요성을 지니리라 본다.
----------------------
[새연재] 음악을 듣는 신경세포들의 ‘합창’
-한겨레의 과학웹진[사이언스 온] 2012. 05. 18 기사
음악의 인지신경과학- 위키피디아 자료
MIT 신경과학연구소의 [음악과 뇌] 자료
음악은 뇌로하여금 주의를 돌리게 함 - 스탠포드대 연구
뇌는 지능을 향상시킴 (기억, 주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추리 능력 등의 인지기능)
- passive listening to music seems to help a person perform certain cognitive tests, at least in the short run. Actual music lessons for kids, however, leads to a longer lasting cognitive success.
“The top engineers from Silicon Valley are all musicians.”
Thursday, February 2, 2012
미래사회에서의 대학체제, 배움방식, 인지양식은 어떻게 변할까?
미래사회에서의 대학체제, 배움방식, 인지양식은 어떻게 변할까?
The university, learning styles, & cognitive styles in the future society: A speculation
작년에 뉴욕타임즈의 데이빗 브룩스의 칼럼기사를 바탕으로 시작하여,
21세기에 우리는 새로운 뉴-뉴-휴머니즘 시대에 들어 왔고 소프트 IT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인지적 정보처리를 하며 사는 새로운 삶의 환경에 서있고
레이 커즈와일의 말을 빌어 이제는 기계지능과 인간지능의 경계가 무너져 새로운 인간관을 수용하여야 할 시점, 특이점에 도달할 것임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트위터, 페이스북스 등의 SNS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 삶과 일의 모습들이 달라진 현실이 널리 확산되었고, 세상을 떠난 스티브잡스 등에 의해 아이폰 등 스마트 모바일 폰의 시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금년 1월에 감기와 강추위로 쉬면서,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뉴-휴머니즘 세상이) 우리 인간의 인지의 방식, 새 지식(배움)을 획득하는 방식,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 더 나아가서 기존 대학의 교육-학습 방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까, 그것은 20년, 30년 이후의 미래 인류 사회를 살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결국 어떠한 종류의 미래 인류 사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론 인류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그를 활용하는 우리의 일상의 삶의 방식이 이를 결정하겠지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현재의 수많은 학부모와 학생들, 고시 준비생 등이 그렇게도 매달려 있는 현재의 한국적 대학, 삶의 방식, 사회 진출 시스템이 어떠한 방식으로 무너지게 되는가, 그들의 현재의 모든 애씀의 소동들이 그 미래 어떤 시점에서는 마치 쉐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처럼 “Much Ado About Nothing”이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까 ....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대학 시스템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변화될 수 밖에 없을까, 그 미래에 현재의 한국적 대학 체제가 과연 잔존할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현재 방식의 대학이 잔존(survive)한다면 그런 대학의 교육-학습 체제, 그 시점에서의 사람들의 앎-배움을 추구하는 일상적 인지적 양식 등은 무엇일까 ....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the university as we know it is an endangered species. ” 라는데....
전통적인 대학의 모습 (- 단일 학과가 뚸어난 우월성을 지닌 연구중심의 대학 모습 -)은 21세기의 미래에 더 이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학문이 하나의 단일 학문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여러 학문들의 학제적 수렴 융합에 의하여 그 연구 대상 현상을 연구하게 된다. 이제는 학문간 협동이 학문의 발전에 열쇄인데, 기존의 대학의 단일 학과 중심의 체제와 학문 형태는 이런 새 모습의 학문의 형태와는 어긋난다, 그런 단일 학문 중심의 학문은 발전가능성, 장래가 없다. 기존의 단일 학문 행정체제, 그리고 그런 학과 안에서의 연구-교육자들의 지배순위 형태는 이제 용도 폐기되어야 한다. 또한 기존의 단일 학과 체제는 사회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현재의 단일 학과 체제는 직업적 경력을 이루어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못 된다. 계속 변화하는 사회, 학문과, 계속 수정되고 새로운 앎과 변화 가능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도움이 못된다.
스탠포드, MIT, 하바드 등의 대학에서의 최근의 새로운 변화는 미래 인류 사회에서의 대학의 역할, 개인의 배움의 양식과 그 추구 목표, 배우는자 (학습자)의 역할 등에 대하여 커다란 발상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예; MIT의 여러 학과의 강의 자료 공개와, 온라인 학습의 확산 공지, 2011, 12월 19일; MIT today announced the launch of an online learning initiative internally called “MITx.” .... MITx open learning software available free of cost,.... enable learning content to be easily portable to other educational platforms that will develop.
“a transformative initiative for MIT and for online learning worldwide. On our residential campus, the heart of MIT, students and faculty are already integrating on-campus and online learning, but the MITx initiative will greatly accelerate that effort. It will also bring new energy to our longstanding effort to educate millions of able learners across the United States and around the world.
The web is their classroom, Facebook is their community, the world is their study group. The days of walled gardens (기존 대학, 교육, 배움 체제) are over . . . if universities won't adapt, students will do it without them." 라는데...
이러한 경향들, 즉 선진 그룹의 대학들의 강의와 자료의 개방화, 온라인화, 세계의 젊은이들을 모두 학생으로 삼는 세계화의 경향의 추세, 그리고 그 교육-배움의 당사자인 사람들의 (지금은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지만 갈수록 더욱 더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의) 일상적 인지, 앎에의 추구, 지식 획득, 활용, sharing with, 협동 방식들이 궁금하여 진다.
인터넷과 SNS에 매달리는 지금의 우리의 삶의, 인지의 방식의 확산으로 인해 사회가, 대학이 현재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진 20년 후의 상황, 그 시점에서의 사람들이 중요시하게 되는 인지 방식은 무엇이 될까?
한국의 교육 기획과 행정은, 사회는, 그 시점에서의 한국 사람들이 급변휴파는 세계의 지식창출, 활용 체제와 경쟁할 수 있는 그러한 인지 양식과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대학은, 교육부는, 대학은, 기업은, 사회일반은, 가정은, 개인은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까? 그리고 한국의 인지심리학은, 인지과학은, 응용인지공학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
셍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20년, 30년 후의 세상은 (대학, 기업, 사회, 개인의 일상적 삶, 개인이 지식을 습득하고(배우고) 활용하는 방식 등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글 검색을 통해 관련 주제에 대하여 70 여 쪽의 자료를 다운받기도 하였고,
어제(2012. 02,03) 공개된 미국 심리과학협회 (APS) 웹진 자료 [‘디지털 시대의 인지] 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미래의 대학의 모습이 어떠하여질까에 대한 다운받은 자료원들은 다음과 같고
========================================
THE IDEA OF THE UNIVERSITY COLLOQUIUM
[The University in the Future]
-by Don Michael Randel
- 2000-2001
“ the IDEA OF THE UNIVERSITY“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
The future of the university and the university of the future: evolution of ivory tower to entrepreneurial paradigm
-Henry Etzkowitz & , Andrew Webster Christiane
-2000
- triple helix modelof academic–-industry–-government
- ‘'entrepreneurial university’'
---------------------------
Nature
[The university of the future]
-The traditional model of the US research university ? based on the pre-eminence of the single-discipline department ? needs to be stretched and challenged.
- 446, 949 (26 April 2007) | doi:10.1038/446949a;
---------------------------
European Science Foundation
[The University of the Future]
- 15. July 2008 10:02
---------------------------
OECD
[Centre for Educational Research and Innovation (CERI) - University Futures]
http://www.oecd.org/document/18/0,3746,en_2649_35845581_31245522_1_1_1_1,00.html
[Higher Education to 2030: What Futures for Quality Access in the Era of Globalisation?]
- Dec. 08, 2008
---------------------------
Associate Press
[25 Predictions for the University of the Future]
July 29th, 2009
By Emily Thomas
---------------------------
BBC
[Universities look into the future]
- The current funding crisis will transform Britain's universities by 2020.
-By Mike Baker
- March 20, 2010
---------------------------
BBC
[What will universities of the future be like?]
-By Hannah Richardson (BBC News education reporter)
-9 October 2010
---------------------------
P2PU:
[The Future of Learning? The Future of the University?]
-Peer 2 Peer University
- Schmidt, Philipp (Department Peer 2 Peer University
-March 07, 2011
-UTUBE
---------------------------
New York Times
[Envisioning University of Future, in Person or Online]
-By D.D. GUTTENPLAN
-Published: October 23, 2011
---------------------------
HIGHER EDUCATION
[University of the future is here]
-BY: LOUISE WILLIAMS From: The Australian
-June 01, 2011 12:00AM
-THE way Bill Gates sees it, the university as we know it is an endangered species.
---------------------------
GUARDIAN
[Imagining the university of the future]
- The way universities deliver learning, see their role in society and fund their activities is changing fast.
- Nov. 09, 2011
---------------------------
REUTERS
[Udacity and the future of online universities]
-By Felix Salmon
- JANUARY 23, 2012
==================================================================
최근 미국 심리과학연합회 (APS)에서 월간 기관지 Observer 지 웹진 기사로 공개한 기사에
“Rewired: Cognition in the Digital Age” [Observer Vol.25, No.2 February, 2012]
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컴퓨터에 친숙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멀티태스킹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인지적 정보처리 특색, 장단점, 추천 전략 등이 제시되어 있어요. 그중 일부를 요약하고 다른 자료를 추가하면,
1. 끊임없는 인터넷, SNS 사용은 우리의 뇌의 변화를 가져온다.
2. 컴퓨터,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정보의 내용보다 정보 인출 위를 더 잘 기억한다.
3. 웹 사용 습관은 웹 정보 검색과 읽기를 더 잘하게 만든다.
4. 컴퓨터를 자주 늘 사용하는 사람은 멀티태스킹, 태스크 스위칭을 잘하게 된다.
5. 멀티태스킹이 우리의 컴퓨터 사욘 활동의 표준이 되었다.
6. 그러나 멀티태스킹에 능숙한 사람은 자료 정보 내용을 깊숙이 처리하지 않으며, 쉽게 주의가 흩어지며. 불필요한(무관련) 정보를 무시하지를 잘 못한다.
7. 멀티태스킹은 배움(학습)의 질을 저하시킨다. (자신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든다.)
8. 인터넷, 컴퓨터의 사용의 증가로 사람들의 인지양식은 정보의 내용보다는 정보의 위치(where)를 기억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9. SNS 등은 담배나 술 중독보다 더 심한 중독 현상을 가져온다.
10.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페이스북 등의 SNS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20년, 30년 후의 이러한 인지적 양식을 매일 활용하는 우리의 (또는 우리의 자녀들의) 인지적 방식이 어떻게 변하여 있을지, 그 사회는 어떠한 사회일지, 그 시점에서도 지금과 같은 대학 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을지, 그 시점에서 많이 필요하고 잘 나가는 직종이나 전문가는 무엇이 될지...
그리고 그에 대비하여 인지과학은 무엇을 해야 할지 (for the society, the Universities, and people)
자못 궁금해진다.
2012. 2. 3. 이정모
Subscribe to:
Posts (Atom)
Korean Psychological Association (KPA)
- Facebook: (Jung-Mo Lee)
- Home in Academia site :(Jung-Mo Lee)
- i- Naver Blog (Jung-Mo Lee) (Korean; 한글)
- Jung-Mo Lee 's SKKU homepage ( in Korean)
- Jung-Mo Lee 's VITAE/ homepage (in English)
- Korean Psychological Association (KPA)
- Korean Society for Cognitive and Biological Psychology (KSCBP)
- Korean Society for Cognitive Science: KSCS
- 인지과학 설명: 1. http://cogpsy.skku.ac.kr/cwb-data/data/cogscience/1-cognisci-intro-hwptxt-jml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