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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28, 2011

Going beyond the Brain Culture. // (text in Korean)



     Going beyond the Brain (Science) Culture.
                                                                -(text in Korean)
[Abstract]: Quoting the reviews of the two books on brain, [Brain Culture: Neuroscience and Popular Media] and [The Tell-Tale Brain: A Neuroscientist's Quest for What Makes Us Human], it was discussed that we should go beyond the current "brain" fad. The current fad of 'brain culture' was explained as a phenomenon not reflecting the true facets of science, but caused by the very nature of human cognition of biased heuristic thinking and of human mind, driven by the narrative principle of constructing stories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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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과학 지상주의 문화에 대한 반성: 최근 해외에서 발행된 두 권의 책과 관련하여 
 
요즈음 국내나 서구나 ‘뇌과학 지상주의’ 문화가 학계나, 매스컴이나,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금년에 해외에서 출간된 뇌과학에 대한 영문 서적 두 권에 대한 서평을 참조하면서 국내에서 널리 일고 있는 뇌과학에의 몰입 문화 경향(pop culture)에 대하여 몇 가지 개인적 생각을 전개하여 볼까 한다.
 
먼저 언급하려는 책은 미국 텍사스 주 Southwestern 대학의 Communication학과 조교수인 Davi Johnson Thornton 박사가 쓰고 Rutgers University Press에 의해 2011년 5월에 출간된, [Brain Culture: Neuroscience and Popular Media] 라는 책이다
- 동명이서의 다른 책들이 있음에 주의하세요 -
 
사우스웨스턴 대학의 자료에 의하면(http://www.southwestern.edu/live/news/5504-brain-culture),
이 책에서 Thornton 교수는 지금의 사회문화적 ‘뇌지상주의’ 유행은 뇌가 보여주는 실제 과학적 사실 이상으로 뇌영상 그림에 사람들이 빠져 있는 상태이라고 보며,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문화적 유행을 과학적 뇌가 아닌 ”수사학적 뇌 (rhetorical brain)‘에 빠진 상태라고 본다. 인지신경과학 분야의 과학적 발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의해 묽어진(맹물을 탄) 해석적 틀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뇌를 훈련시키면, 적절히 사용하면, 학습능력을 높인다던가, 회사나 대인관계에서 잘 적응한다던가, 아동발달을 촉진시킨다.” 등의 자기계발서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즈음의 현상에 대하여 Thorton 교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추세에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러한 자기계발서들 또는 학습능력증진서들이 인지신경과학의 과학적 사실 그대로를 넘어서 일종의 사회문화적 유행의 물타기 또는 키우기를 하고 있고(비록 긍정적으로 도움이 되더라도), 현재의 ‘뇌’유행은 과학적 사실에다 뇌영상 그림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회문화적 해석을 덧씌우는 작업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하여는 Brain Picking이라는 흥미로운 블로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Maria Popova가(대학원 시절에 뇌영상 공부를 하였음) 유명한 월간지 [The Atlantic] 지에 'Brain Culture': How Neuroscience Became a Pop Culture Fixation“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8월에 서평을 썼다.
아트란틱 지의 부제목(A book looks at how the cerebral cortex has become a 21st-century version of Warhol's soup cans or Marilyn Monroes)을 참고하고 이 기사관련 글들을 종합하여 전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뇌(지상 주의) 문화의 유행”은 뇌과학의 사실적, 과학적 발견을 다룬다고 하기 보다는 뇌영상 사진들에 매료된 인간의 시각 중심적 사고(“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과다일반화적 사고, 마음의 이야기 짓기적 본질, 노벨상 수상자 카네만 교수 등이 발견한 편향적 오류적 사고 경향 등에 바탕을 둔 일종의 유행적 사회문화현상이다. 맑은 과학적 사실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뇌에 대한 일종의 신화적 표현을 통해 그리고 그 기능적 가능성에 대한 낭만적 이야기 짓기를 통해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 뮤즈가 된 것이다 (The brain, it seems, has become a modern muse.// http://www.biopsychology.com/news/index.php?descType=always&type=chapter&id=1&page=0 에서). 생물적 기관인 ‘뇌’가 하나의 ‘문화적 기관의 지위(cultish status)를 지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매일 우리는 신문방송에서 “뇌과학이 .... 이런 이런 사실을 새로 발견했다. 그 의의는 심대하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 이렇게 달라질 것이다.”라는 매스컴 기사를 접한다. 또 새로 발간된 자기계발서에서는 ”....이러 이렇게 하면 뇌가 ... 이렇게 달라질 것이고, 그를 통해 우리는 ..... 이러 이러한 증진된 학습능력, 대인관계 능력 ...등등을 지니게 된다“라는 글이나, 광고문구를 보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는 뇌의 지위, 기능, 미래 가능성 등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거나 믿고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과, 뇌 영상 또는 관련 과학적 단서 사실들을 ’교묘하게‘ 연결한 -일종의 수사학적, 화용론적- 이야기 틀 속에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이나 그를 받아 수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착각을 생성하고 있고 그에 빠지고 있다고 절대로 믿지 않는 그러한 이야기 틀 속에 -)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위의 사이트의 표현을 번안하자면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우리가 바라는 바 (특히 뇌를 긍정적 효용성을 위하여 어거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바) 사이의 단절의 실로 비극적인 드러남(a tragic manifestation of the disconnect)일 뿐이다.
 
이 모든 것, “뇌과학이 .... 이런 이런 사실을 최근 발견하였고, 그것은 우리에게 .... 이러 이러한 심대한 의의가 있다“ 는 등의 매스컴 기사 또는 책자들의 주장은 사실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현상을 (노벨 수상자 카네만의 주장처럼) 늘 편향적으로 왜곡하여 사고하며 과대 일반화, 이분법적 범주화를 하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사고 경향성, 그리고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사실이기보다는 자기/우리 중심적 구성으로서의) 이야기(내러티브) 틀을 만들어 가는 인간 인지의 본질적 특성]]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하나의 사회-문화적 유행(fad/ pop-culture)적 개념틀에서 나온 내러티브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거대한 ‘인지적 착각(Cognitive Illusions)'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이정모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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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언급할 서평은 널리 알려진 웹진 사이트 “Wired"에서, 조나 레러 {”푸르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라는 책(http://www.yes24.com/24/goods/2783494)의 저자}가 Thorton 교수와의 인터뷰 형태로 쓴 서평이다.
그는 신경과학의 ‘언어’ (수사; rhetoric) 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 기사에서 저자와 인터뷰를 하는 레러 두 다, 뇌과학 유행을 ‘나쁘다’라고 명시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비껴가기는 하였지만, 하여간 요즈음의 일반시민의, 뉴스미디어의 ‘뇌과학 열풍’이 일종의 수사학적 문화적 현상이며 참 과학과는 거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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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언급할 책은 금년(2011) 1월에 Norton회사에서 출간한
저명한 신경과학자 라마찬드란의 책 [“The Tell-Tale Brain: A Neuroscientist's Quest for What Makes Us Human” - by V. S. Ramachandran -] 이다.

이 책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서평을 썼지만, 여기에서는, 뉴욕타임즈 북리뷰판에 지난 3월에 McGinn 교수가 쓴 서평을 중심으로 필자의 개인적 생각을 첨가하여 전개하겠다.
콜린 맥긴교수는 옥스퍼드대 졸업후, 런던대를 거쳐서 미국 마이아미대학 철학과에 부임하여 철학을 가르치며, 심리철학 주제에 대하여 계속 왕성한 연구, 저술 활동을 하여온 저명한 철학자이다.
 
책 저자 라마찬드란은 UCSD의 ‘뇌 및 인지 센터장’으로,
(라마찬드란의 다른 TED 강연 동영상: http://blog.daum.net/engineer66/8370464)
이 2011년 새 책에서 뇌에 이상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 결과들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경현상은: phantom limbs, 시각, 공감각, 거울 뉴런, 자폐증, 정서, 언어, 미적감각, 의식 등이다.
 
여기에서는 나는 라마찬드란이 밝힌 신경과학적 발견과 그 의의에 대하여서 보다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심리철학자 McGinn 교수가 비판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맥긴 교수는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저자인 라마찬드란 교수 보다는 신경과학자 일반과 ‘뇌과학 지상주의’ 열풍에 매료된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 비판을 던지고 있다. 그 비판을 몇 개의 조목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라마찬드란 박사 등 신경과학자들은 지나친 신경환원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그들은 철학에서 왜 수세대를 걸친 그 긴 세월동안 심-신의 문제를 논의하여 왔는지, 왜 그것이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학술적 문제가 되어 왔는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다. 여러 심리 현상은 신경적 메커니즘으로 단순히 환원하여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리현상은 개념적 물음의 문제이지 신경적 구조의 기제(기작; 기전)의 문제가 아니다(These are conceptual question, not questions about.... neural machinery..). 라마찬드란은 왜곡, 생략, 과장 또는 (과대)일반화를 하고 있다.
 
2.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독특하다(우수하다는 의미의)고 하는데, 그건 인간중심주의의 anthropocentrism의 말이다. 또 낙관적 측면만 신경과학적으로 기술하는데 어두운 측면도 있다.
 
3. 라마찬드란의 이야기는 과학적 이야기가 아니다, 가치가 개입된 평가적 이야기일뿐(not scientific at all. it is evaliative talk) 과학적 정당화(justification) 대상이 못된다.
 
4. 그렇다면 왜 신경과학적, 뇌과학적 발견은, 이야기는 우리를 그리 매료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뇌신경 현상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에 뜨는 쇠가 신기하게 여겨지듯이, 전혀 다른 실체라고 생각하여온 뇌와 마음이 관련되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그에 매료되는 것이다. 신경적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연결시켜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마음의 의미구조에 우리의 매료에 열쇄가 있는 것이다. 시각적(뇌영상) 자극을 단서로 하여 개념적 연결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인간의 이야기 짓기 중심의 마음의 의미구조가 전제되어서야 비로소 뇌과학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우리를 매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이야기 짓기는 사회-문화적인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 짓기, 개념적 연결 사고를 하는 인간적 의미구조를 제거한다면 뇌과학적 (아니, 더 넓게 이야기하여 어떠한 과학이라도 그) 발견 사실들은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뇌에 대한 과학적 발견 그 자체가 그냥 그대로 심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 현세대의 한국적, 더 나아가서는 범세계적 인간 대부분의 착각이라는 문화적 유행(pop-culture)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사는 문인들이 서로의 힘과 생각을 모아서 발간하는 계간지 [시와 반시]의 2011년 가을 호에 게재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던 원고의 초벌 글을 보완, 편집하여 여기 아래에 첨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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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을 넘자면? :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의 연결점인 인지과학의 새 틀
 
-이정모-
(계간지 [시와 반시] 2011년 가을 호)
 
1. 뇌과학과 주변 학문들
 
이전에는 해부학 중심이던 신경과학이 20 세기 후반에 뇌영상기법 등의 방법론의 개척에 의해 뇌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연구 방식을 재구성하면서 뇌연구 결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로 뇌과학이 과학의 총아로 떠올랐고, 뇌과학의 연결 성과와 가능성에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뇌과학이 일반인의 지적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뇌의 해부학적 측면이나 유전학적 생물적 기반보다는 뇌의 기능을 밝히는 연구 성과 때문이었다. 일반인이 관심을 가지는 뇌의 그 기능은 실상은 뇌의 심적(인지) 기능이다. 그러한 면에서 뇌과학이 각광을 받는 까닭은 사실은 뇌와 마음의 연결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뇌과학 이외에도 인지과학, 인지신경과학 등이 있다. 현재 추세로는 이들 학문간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 서로 중첩되는 분야가 많으며 연구자 자신도 자신의 연구가 어떤 분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미국 대학들에서 뇌과학 학과도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명시적으로 인지과학 연구를 표방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MIT 등에서와 같이 ‘뇌 및 인지과학 학과’가 학과의 공식적 이름인 것은 이러한 학문적 경계의 애매성과 뇌과학이 인지과학적 연결이 없으면 공허한 것임을 잘 나타내어 준다.
 
각광을 받으며 떠오른지 20 여년 밖에 안 된 뇌과학이 다른 학문들과 연결되어 많은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 내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현재(특히 국내에서는)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에 뇌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진전된다면 인간의 마음 작동의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입장이 일반인들이 지니는 생각이다. 이 글은 그러한 과다 단순화한 관점을 넘어서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2. 인지주의 틀: 형성과 인지과학
 
뇌과학의 형성과 발전의 전파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20세기에 인류문화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인지주의’ 틀의 형성이라고 하겠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기에 머물던 고전적 계산기가 인지주의 틀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의 지능적 컴퓨터로 재개념화되어 새 세상이 열렸다. 생명체인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만든 인공물의 하나인 컴퓨터가, 본질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동류의 시스템이라는 발상의 대 전환으로 인하여 인류 문화에서 컴퓨터 시대, 디지털 문화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인터넷 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디지털컴퓨터가 모두 상징(기호)을 조작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라고 보는 관점을 정립한 이러한 인지주의 틀의 출현을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과학혁명, 곧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를 최초로 연구하여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인 스페리(R. Sperry)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지주의의 등장은 하나의 「과학혁명」이었고, 과거의 물리학 중심의 전통적 과학에서처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결정된다는 상향적 입장이, 인지주의 과학혁명에 의하여 하향적 입장과 조합하여 ‘이중 방향’, ‘이중 결정’ 모형으로 과학이 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과학관과 세계관이 급진적으로 수정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인지과학과 여러 테크놀로지(특히 인공물과 인간의 상호작용 관련 기술)의 수렴, 융합은 또 다른 미래 가능성들을 시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1세기는 ‘국제화시대’가 아니라 ‘인지시대(the Cognitive Age)’라는 선언적 칼럼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넓게 본다면 인지과학은 뇌과학을 그 하위 구성영역의 하나로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본다면 뇌과학을 인지과학과 차별화 하여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뇌과학 탐구 주제에서 인지 기능을 제외하여야 하고, 그렇게 되어 남는 뇌과학은 별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른 대안으로 신경과학자들의 일부가 주장하듯이 인지과학은 신경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인지과학은 신경과학 또는 생물학의 하위 학문이 되는데, 이것은 곧 ‘의미’란 신경적 활동 이상의 것이 아니다 라는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귀착된다. 이 관점은 인지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수용되기 힘든 입장이다.

3. 뇌과학 지상주의의에 대한 반문
 
21세기의 둘째 10년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은 과연 어떤 시점일까? 인류 문화, 뇌과학을 비롯한 과학과 유전공학, 아이폰 등의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인간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의 정립이 요청되는 시점일까?
 
우리는,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심적 현상을 뇌의 신경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뇌과학의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현재에는 뇌과학 연구가 갓 출발하여 진행되는 단계이어서 모든 것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뇌과학 연구가 충분히 발전하고 진행된다면 인간사의 모든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뇌과학의 신경과정 작용의 환원주의적 원리에 의해 이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틀이 일반인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신경과학자들, 과학학술지, 매스컴이 ‘뇌는 곧 마음(mind)이다’ 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뇌 연구 결과 하나 하나에 대하여 매료되어 뇌 지상주의에 매어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마음은, 의식은 뇌의 신경적 활동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신경과학자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에는 어떤 잘못이 있을까? 뇌에 대한, 신경과학에 대한 나의, 우리의 매료됨이 과연 21세기 내내, 그리고 22세기와 그 후의 미래에도 지속될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뇌과학적 발견과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생각의 변화에 내가 뒤지지 않고 따라가기 위하여, 그리고 21세기 후반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생각의 틀을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까?

4. 뇌과학을 넘어서 1:
 
지금 21세기 초엽 현재, 지성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그리고 무시 못 할 중요한 생각 틀의 변화의 하나는, 바로 ‘나의 의식(마음)’은, 나의 몸 더 좁게는 ‘나의 뇌’에 의해 ‘나’가 아닌 것과 구별될 수 있다는, 즉 ‘나는 나의 뇌다’라는 식의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마음, 의식을 밖으로 ‘확장시켜서, 뇌-몸-환경을 하나의 불가분의 총체적 단위로 이해하려는 스피노자 식, 메를로퐁티 식의 생각이 전개이다.

카르트는 인간의 몸을 동물과 연속선상에 있는 하나의 자동기계로 생각하며,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몸을 동물적기계로 보았고, 마음과 영혼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음은 사고하는 실체이나 외연을 지니지(공간을 점하고 있지) 않는 반면, 몸은 공간에서 기하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외연을 지닌 실체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수정론적인 입장이 이후에 있었으나, 서구의 문화사에서는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적 입장이 지배하여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신경과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마음을 뇌의 신경적 활동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일원론(마음=뇌)적 관점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기는 하였으나, 정신(마음)과 물질을 대립적으로 보는, 또는 생각의 주체와 그 대상이 되는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데카르트식 존재론의 관점은 아직도 현재의 신경과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뇌 = 마음’, ‘마음 = 뇌’, ‘의식 =뇌’ 라는 단순한 과학적 믿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움직임이 철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태동하고 있고, 이러한 ‘마음’ 개념의 재구성의 추세가 더욱 확산된다면 단순히 철학,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과학 전반, 그리고 인공지능, 로보틱스, 다른 인간관련 공학 등에 강한,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리라 생각된다. 특히 로보틱스의 연구에는 가장 강한,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된다.
 
저명한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 데이빗 찰머스 등이 이러한 발상의 전환 중심에 서 있으며, 여러 학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물론 강한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구호의 핵심은 ‘데카르트를 넘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마음)과 물질(신체),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구별한 데카르트 식의 존재론의 개념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현재 신경과학의 부분인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관점이(그러나 신경과학자라고 하여 모두 환원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활동을 왜곡하여 이해, 접근, 탐구하게 되고,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철학자들의 일부가 늘 그렇게 이야기하여 오던 이야기이기에, 또 철학자들이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리지 못할 이유는 이러한 논의를 최근에 다시 전개하도록 촉발시킨 사람들이 철학자가 아닌 인공지능학자, 로보틱스 연구자,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MIT대학의 미디어랩의 중심연구자였던 로드니 브룩스 교수는 인공지능, 로봇 등을 연구하던 중에, 과거의 데카르트 식의(고전적 인지과학) 인공지능이나 로봇시스템 이론으로서는 제대로 된 인공지능시스템이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스템들에 내장된 프로그램과 몸-환경이 밀접히 연결된 새로운 개념화가 필요함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이에 다른 인공지능 연구자, 로보틱스 연구자들이 점차 공감하였다.
 
공학자들의 이러한 강한 이의 제기에 힘을 얻은 철학자들은 과거의 현상학적 철학 전통에서 이야기하던 개념들을 다시 꺼내어 되생각하고 가다듬어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몸-환경-활동의 중요성을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의 생각들에 현재까지 진행된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동물행태학, 인류학, 로보틱스 등에 대한 연구를 연결하여 마음, 의식, 존재 개념들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재구성의 결과로, 마음은, 의식은, 뇌를 넘어서’ 개념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알바노에의 「뇌과학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바를 인용하자면, ‘마음, 의식, 나 = 나의 뇌(의 활동)’ 이라는 데카르트 식의, 신경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거대한 착각’에서 이제는 우리가 빠져 나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자연과학을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적 재개념화 도움에 의하여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뇌는 마음과 같지 않다’, ‘마음(의식)은 뇌와 몸, 그리고 환경(다른 인간과의 관계 포함)의 상호작용 활동에 의존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몸과 환경을 빼놓고 “뇌가 곧 마음이다” 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유기체의 삶은 (뇌의) 내부에 있지 않다’, ‘세계는 뇌 안에 만들어지거나 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환경과의 행위적 활동) 관계에서 (비로소) 생긴다’, ‘뇌 혼자서 무엇을 이룰 수 없기에, 실상 모든 「의미」는 머릿속에 없다’, ‘우리의 경험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뇌 자체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환경)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 (행위, 활동) 관계다’,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가 의식의 자리라는 신경과학자의 경솔한 확신, 착각’, ‘우리가 우리의 뇌의 신경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집에서 실험대로 가져온 선입견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 일반인, 매스컴 등 우리 모두가 빠져있는 이러한 (뇌과학적) 거대한 착각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포기하고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거대한 착각을 벗어나서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체화적 인지’ 또는 ‘확장된 마음’의 틀로 지금 인지과학의 대안적 관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4. 뇌과학을 넘어서 2: 체화적 인지 틀의 형성
 
인간의 마음에 컴퓨터 메타포를 적용하여 1950년대에 출발한 인지과학은, 이후 1980년대에 뇌 메타포를 적용하여 연결주의와 신경과학(뇌과학)을 발전시킨 이후,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또 다른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 변화의 틀은 위에서 언급된 탈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움직임이다. 
최근에 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또는 확장된(물리적 공간에 연장된) 마음: Extended Mind))'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존재론의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 관점이나, 그 반대인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일원론 관점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이다.
 
이 틀은 인간의 마음, 인지가 개인 내의 뇌 속에 추상적 언어적 명제 형태로 표상된 내용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몸을 가지고(embodied) 환경에 구현, 내재되어(embedded) 사회문화환경에 적응하는 (몸이 있는) 유기체가 ‘환경’과의 순간 순간적 상호작용 행위 역동 상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즉 몸과, 문화, 역사, 사회의 맥락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되는 그러한 ‘역동적 활동’으로서의 마음임을 강조하는 접근이다. 
이 ‘체화된 인지’의 보는 틀은 고전적 인지주의의 정보처리 접근이 지니는 제한점을 벗어나려 한다. 즉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한 개인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인지적 표상이나 정보처리가(고전적 인지주의 입장) 아니라, 몸으로 환경 속에 구체화되며, 몸의 활동을 통하여 환경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로서 마음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리고 환경의 다른 인간의 마음이나 각종 인공물에 분산표상된 마음,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상황 지워지며 행위로 구성되는 마음으로서 보려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의 심적 상호작용의 실제는 몸에 의존한다. 따라서 감각운동적 바탕이 마음의 핵심이 되며, 고차 심적 기능도 이러한 기초의 제약과 허용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각은 능동적이며, 행위는 지각에 의해 인도되며, 신경계, 몸, 환경 요인이 실시간 상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이해함을 통하여 과학적 설명이 주어진다. 최상위의 매스터라고 하는 뇌에 의한 전반적 계획이나 통제가 없이도, 분산된 단위들의 지엽적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가조직적(autopoietic)으로, 창발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 심적 현상이다. 마음은 환경에 확장된, 상황지어진 것으로 분석, 이해되어야 하며, 자연적, 생태적 상황에서 맥락이 고려되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통적 논리적 형식적 접근보다는 환경과의 역동적 시간 경과와 상호작용성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역동적 접근을 통하여 탐구되어야 하며, 현상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체험되는가 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도 설명적 요소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마음이 이루어내는 ‘의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할 수 있다.
 
즉, 
[1] ‘뇌’를 포함하는 ‘몸’과, 
[2] ‘환경’(각종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과, 
[3] 그리고 이 둘이 연결되는 상호작용적 활동(interactivity)의 

세 측면이 서로 괴리되지 않고, 하나의 역동적 전체로서 개념화되는 그러한 접근을 하여야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듯이 ‘몸’이라는 전체도 아닌, 한 부분적 실체인 ‘뇌’에서 마음의 모든 것이 일어나며, 환경과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등에 연원을 둔 이러한 개념적 변혁에의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마음과 몸에 대한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적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심신이원론이나,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뇌과학자들이 지니는 ‘마음은 곧 뇌의 신경과정이다’ 라는 환원주의적 일원론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보는 틀의 펼침이다. 이 체화된 인지 접근은 고전적 인지주의에서 배제되었던 ‘몸’을 마음의 바탕으로 되찾게 하며, 몸을 지닌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환경’을 인지과학과 심리학에 되살려 놓게 하며, 공간적 연장이 없었던 추상적 ‘정신적 실체’라는 마음이 아니라 ‘몸을 통해 환경에 연장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으로 마음 개념을 재개념화 할 가능성을, 아니 그래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개념을 이렇게 ‘뇌를 넘어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는 실체의 개념으로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재구성의 틀은 심리학, 인지과학의 기초적 이론 틀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 등), 테크놀로지(로보틱스 등), 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적, 응용적 틀의 재구성에 (뇌과학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상당한 시사를 지니게 된다.
 
이 ‘체화된 인지’ 틀이 떠오르기 이전에 이미 인지과학의 틀을 도입하여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었다. 학문간 수렴, 융합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인지정치학,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신경경제학, 행동법학, 인지법학, 신경법학, 학습과학 등의 새 분야들의 떠오름이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그러한 분야들에서 뇌의 신경적 현상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개념화하려던 시도들의 편협한 한계를 넘어서, ‘체화적 인지’의 틀을 도입하여 인간과 사회현상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미래 사회과학의 과제로 남는다.
 
공학의 분야들 중에는 처음부터 인지과학의 한 중심 분야이었던 인공지능 연구의 연결에 의하여 각종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나 디지털 기기의 디자인 분야들, 특히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어 왔다. 이러한 분야들에서 뇌과학 연구의 발전 결과와 그 시사를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연구 영역이나 뇌-로봇 인터페이스(BRI) 영역이 이러한 시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줄 듯하면서도 문제점이 계속 남는다.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meaning)’를 습득, 창조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존재, 환경과 괴리되지 않고 하나되어 살아 움직이는 몸이 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의미를 지어내는’ 삶을 인공적으로 구현하기 힘들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체화된 인지’ 틀은 여러 가지 새로운 개념적 재구성을 시사한다. 예술의 분야에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채, 몸을 통해 구현되는 마음’의 관점은 문학, 음악, 미술, 공연 등의 분야에서 여러 새로운 개념적 구성 작업을 가능하게 된다. ‘뉴 미디어 이론’에 새 인지과학적 틀이 깊숙이 관여되는 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의 분야는 이를 넘어서 또 다른 개념적 재구성이 요청된다. 즉 내러티브의, 이야기의 문제이다.
 
5. 뇌과학을 넘어서기 3: 내러티브적 마음
 
인문학자 마크 터너 교수는 “문학적 마음”이라는 책에서 ‘인지과학의 중심 주제가 사실상 문학적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음의 기본 원리이다’ 라고 하였다. 로이드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에 의하면 내러티브란 인간 마음의 기본적, 일차적 작동 원리이다. 인지과학 출발의 기틀을 닦은 심리학자 브루너(J. Bruner)는 의미 만들기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며, ‘의미’라는 것은 ‘상징(기호)과 그 지시대상’에 의해 정형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에 바탕을 둔 ‘내러티브적 해석’에 의해 매개되고 조정되고 또 재조정되어서 그 맥락적, 개인적 다양성이 살려지고 그 문화적 체계 내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석 틀에 의해서 비로서 생성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넓게 해석하자면, 의미란 문화공동체의 환경에서 부여되는 역동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이며 내러티브적인 것이지, 환경과 별개의 독립적 실체로 개념화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과정이라는 하드웨어적인 것 그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다양하고 수용자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그러한 현상적, 심리적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가 아침부터 밤까지(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열심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이야기’적 의미를 양산하여 내는 그러한 존재이고, [마음의 본질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 생산 공장’]이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인간적 존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란 한 인간이 몸을 통해 환경에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서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체험적으로 엮어 내는 이야기적, 내러티브적 해석이 바탕이 되는 의미이다.
 
이는 비록 환경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정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는 되지만, ‘뇌를 넘어서’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역사와 문화와 개인적 일화들이 엮여져 짜여지는 문화적 의미의 체계이다. 사회문화적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생물학적 그 무엇이다. 뇌과학의 신경적 과정 현상으로만은 도저히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인지적 산물이다.

인지과학에 내러티브적 접근의 도입이 필연적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결정적 산물이며 또한 인간 마음 활동인, 문학을 인지과학에서 연결하여 탐구하여야 하는 것이 요청될 것이다.
 
 
6. 맺는 말: 인지과학과 문학
 
인지과학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기술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들의 문학활동과 독자의 심적활동이 인지과학에서 논하는 언어이해와 마음이론의 적용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생각할 것일까에 대해 저자가 나름대로 생각하여, 즉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저자의 마음이론에 바탕을 두고, 저자 자신의 생각을 상징으로, 표상으로 표현하고, 이를 읽으면서 독자는 자기의 기억에서 ‘이야기(내러티브)적 원리’ 지식과 각종 세상사 관련 지식을 동원하여 그 상징 표상을 정보처리하고 해석하여 이해하고 그것이 정서적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감흥을 갖게 된다. 
문학작품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저자의 글 표현은 독자가 독자 자신의 기억에서 어떠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야기적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기호적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이 해석과 구성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지(정서를 포함한) 과정이며, 인지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과거의 문학(비평)이론들로서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 등의 입장들이 있었다. 이 틀이 20세기 말에 무너지고, 이제는 문학의 내용 전개나 예술을 자연주의에, 진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거나 인지이론에 의거하여 이해 및 분석하고, 비평하고, 기술하려는 입장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기존의 문학(비평) 이론은 주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만 강조하였지, 그러한 문학활동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인지적 측면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 결과가 지니는 시사점을 무시하였다. 실제의 인간은 진화역사적으로 변화/발달한 몸을 지닌 생물체인데, 과거의 문학은(적어도 문학비평이론) 이러한 문학적 산물을 내어놓고 또 이해하는 인간이 자연의 존재라는 ‘자연 범주’ 특성을 무시하여 왔다. 
과거의 문학비평 이론은 문학작품, 예술 등과 관련된 인간 마음의 ‘자연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숨겨진 복잡성」에 대하여 학문적 인식, 과학적 지향함의 수용이 없었다(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아니, 실제의 예술작품 생성 작업 현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나, 문학(비평)이론가들은 문학이론 구성에서 이러한 부면을 무시하여 왔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인간 삶에서 무엇을 위하여 생겨났는가, 문학활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개개의 문학작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들이 진화이론적 관점에서,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앞으로 문학과 인지과학의 연결분야가 인지과학의 응용분야로서 발전될 뿐 아니라, 이 분야가 발전되면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상위수준의 인지과학 이론틀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인지과학적 연구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자체도 문학과 연결됨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보다 거시적인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전개할 수 있음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이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의 작동원리가 본질적으로 ‘내러티브 엮기이다’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제, 인지과학을 위하여서, 그리고 문학을 위해서라도 문학과 인지과학이 연결, 수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의 상위범주인 인문학이 인지과학과 연결되어야 한다. 인지과학과 문학을 연결하는 연결점에서 ‘내러티브적 이야기에 바탕을 둔 인문학’과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인 인지과학이 수렴-융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드웨어적 작동 원리를 밝히는 뇌과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뇌과학은 인간의 의미있는 미래를 위하여 필요조건일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뇌과학 지상주의의 문화적 유행을, 그러한 인지적 착각을 넘어서야 한다.


Friday, October 5, 2007

싸이언스지의 표지 기사: [동물과 인간의 사회적 인지 연구]와 그 시사점

싸이언스지의 표지 기사: [동물과 인간의 사회적 인지(cognition) 연구]와 그 시사점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짓는 한 차이는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짓는 다른 한 차이는 과학에서 무엇을 과학으로 보는가의 차이이다.

후진국: [물질중심의 과학관] 대
선진국: [물질 + 물질 이상의 현상(심리적, 지적, 문화적)을 포함하는 과학관]의
차이이다
후진국들은 선진국에서 과학을 뒤늦게 수입하였기에, 서구에서 예전부터 내려온 고전적 관점인 '물질 중심의 과학만 과학'이라고 하는 관점이 사회에, 학계에, 과학교육계, 정부기관 , 과학정책 기관에 팽배하여 있다.

최근의 싸이언스지의 표지기사로 실린 '사회인지' 관련 연구기사는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시사를 준다. 이 기사에 의하면 침팬지와 오랑우탕과 2.5세 아기의 지적 능력을 여러 실험을 통하여 비교연구하였다. 이연구는 기본적으로 인지과학 이론을 검증한 연구이다.

이 연구에서는

가설1: 인간의 더 높은 인지적 능력, 지능을 지닌 것은 두뇌 크기 때문이다
가설2; 인간이 더 높은 인지적 능력, 지능을 지닌 것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가설2-1; 그 환경은 주로 먹이를 찾아 먹고 사는 물리적 환경에서의 적응 환경때문이었다
가설2-2: 그 환경은 주로 경쟁과 협동 등의 사회적 환경에서의 적응 환경 때문이었다.
가설2-3: 그 환경은 주로 서로 다른 문화집단을 생성하여, 이 문화집단들이 각기 독특한 인공물, 상징들, 사회적 제도와 관행중심으로 적응하게 하는 그러한 환경때문이었다. 즉 유아 초기부터 사회-문화적 인지를 습득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화지능(문화적 인지기술) 가설을 검증하기위한 일련의 연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가 페이지 면수 할애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이언스지의 7페이지를 점하는 표지기사로 실렸다.

이 실험 연구는 실험심리학자이며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인 Michael Tomasello 등이 만들어낸 '영장류 인지기능검사' 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실험 결과에서 보면, 물질 대상 영역에서의 지적 능력 (공간, 수량, 인과성 인식) 에서는 침팬지나 오랑우탕이나 인간이 그리 큰 차이가 없었는데

사회적 영역에서의 지적 능력(사회적 학습, 커뮤키네이션, 상대방의 마음 읽기(TOM, 마음이론)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학습에서는 침팬지와 오랑우탕이 거의 제로 수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인간의 아기는90% 수준에 이르렀다.

이 세 집단간의 단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표들이 뚜렷이 논문에 제시되어 있다. (이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는 그림표가 앞으로 많은 다른 연구논문, 교재들에서 인용되리라 본다.)
인상적인 그림표이다.

2세 인간 아이의 물질 영역에 대한 지적 능력은 진화역사에서 6백만년 전에 인간과 갈라진 침팬지나 오랑우탕과 거의 차이가 없는데, 인간 아기 2세의 사회적 인지기술은 벌써 이 동물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어찌 해석할 것인가?물질을 다루고 물질에 대한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데는 유인원과 인간 아기가 그 지적 능력이 다르지 않는데,
인간과 동물 일반, 나아가서 상위수준의 동물인 유인원과 크게 다른 것이 바로 사회인지 지능이라는 이 결과는 가설 2-3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냥 인간이, 유인원 동물보다 단순히 일반적인 지능(지능 g)의 기억, 학습, 지각 등의 인지적 정보처리 능력이 우월하였다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인지적 능력이 더 높아지게 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탓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 진화역사 상에서 인류의 아기들은 침팬지나 오랑우탕보다

- 물질 중심으로 대상을 다루는 그런 것이 아닌 일, 활동에서 사물의 인과관계를 지각하는 능력이 더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보이는 물질 대상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물질들 사이의, 또는 보이지 않는 물질과 추상적, 상징적, 사회적 사건(대상) 사이의, 또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상징적, 추상적 사건/대상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지각하고 활용하는데 있어서 더 우월하였다고 할 수 있다.
(...ability to understand unobserved causal forces in general. (1365쪽)

- 특히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나 생물의 마음 읽기 (reading the mind of other organisms) 능력 즉 TOM (마음이론; Theory of mind; 상대방의 마음이 어떨 것이다 라고 내 마음 속에서 생각하여 짐작하는 마음 읽기 능력)에서, 오랑우탕이나 침팬지와는 달리 뛰어나게 우월하였을 것이다

- 이러한 능력은 원시시대의 (아마도 직립인간 이후의 어느 시대) 수렵과 채집의 경쟁과 협동 활동이라는 복잡한 형태의 인간 사회적 활동을 통하여 (이전에 하등 동물에서도 초보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초보적 의사소통의 인지기술과 사회적 학습 기술이 더 복잡한 특수화된 형태로 발전되어 연결되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지능의 차이의 핵심: 물질중심의 지능을 갖고 있는가 (인간-동물 공통) 보다는, 그것 플러스 복잡한, 세련된 사회-문화적 인지 능력(skills)을 지니고 있는가의 기본적인 차이에 있다.

빗대어 유추하자면: 선진과학국가와 후진과학국가의 차이의 핵심: 물질중심의 과학관을 갖고 있는가 보다는(선진국-후진국 공통으로 보유), 물질을 넘어선 그 이상 수준의 과학관을 갖고 있는가의 차이에 있다.

단적인 증거(단순화 하여 빗대어서 본다면):
-미국, 유럽 과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현상을 연구하는 심리학, 인지과학, 인류학이 자연과학으로 취급되고 과학학술지 싸이언스 지의 표지 논문기사로도 실리지만, 물질중심의 과학관이 팽배한 한국에서도 이런 연구가 과학적 연구가 아니라고 밀쳐지는 현재의 현실 상황을 넘어서서,
전문과학지에 실리는 가능성이 현실화 되려면 앞으로 10여년을 더 기다려도 될까 말까?
-이러한 한국적 상황에 함께 아파하는 우리들 !

[극단적 비유]
- : 침팬지, 오랑우탕, 후진국과학관: -> [물질 중심]
- : 인간아기, 선진국 과학관 : -> [물질 + 그 이상의 현상(인지, 심리, 문화 등)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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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비유에 동의 안할 분도 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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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지의 원자료

http://www.sciencemag.org/cgi/content/full/317/5843/1360

Science 7 September 2007:
Vol. 317. no. 5843, pp. 1360 - 1366
DOI: 10.1126/science.1146282

Humans Have Evolved Specialized Skills of Social Cognition: The Cultural Intelligence Hypothesis
-저자: Esther Herrmann,1* Josep Call,1 María Victoria Hernàndez-Lloreda,2 Brian Hare,1,3 Michael Tomasello1
(1=막스플랑크 연구소 )

Tuesday, February 6, 2007

인지과학은 IT의 모체적 학문이다

인지과학은 IT의 모체적 학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인지과학이 1950년대에 생겼고, 인지과학에서 제시한 개념과 이론, 실용적 응용의 가능성 등을 기초로 하여 그 후에 정보과학이 체제를 갖추어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인공지능의 창시자들 중의 사람들로 꼽히는 사이먼과 뉴웰이 인지과학자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전에는 단순한 숫자 처리 계산기에 지나지 않았던 계산기를 정보처리와 지능을 지닌 컴퓨터로 대 변혁을 할 수 있게 한 이론적, 개념적 틀을 제공한 것이 인지과학이다. H. Simon, A. Newell 등의 인지과학자가 이러한 개념적 틀의 변혁을 초래한 장본인들이다.

현재 국내에서 너도나도 논하고 있는 IT, 정보과학기술의 이론적 틀과 개념, 예를 들어서 정보처리라든가, 지식표상 즉 데이타버이스 등의 개념을 정보과학이 형성되기 이전에 제시한 것이 인지과학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정보과학기술 관련종사자들도) 모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인지과학이 정보과학에 주는 개념적, 이론적 기초 배경을 모른채, 컴퓨터, 정보 관련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디지털 사회, 정보화 사회 등을 모두 논하고 있고, IT 연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무지의 까닭은 70년대, 800년대에 기초과학이론을 수입하지 않고 응용적 결과만 수입한 국내 과학기술계의 풍토때문이다.
한국 IT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인지과학이 IT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기가 인지과학적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IT 종사자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려거나, 로보틱스를 전공하거나, IT 분야에서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인지과학이 무엇인지, 인지과학이 정보과학, IT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였고, 미래에 계속 어떤 기초를 제공하며 어떤 응용기술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 등을 알이두어야 할 것이다.

인지과학은 IT과학의 모체적 학문이다 (하드웨어 측면은 제외하지만).

IT와 인지과학의 연결, 융합은 여러 영역에서 상당히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

- 첫째는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인간처럼 언어를 감각, 지각하고 언어를 이해하고 생각하 는 인공지능 시스템이나 로봇을 만들려면, 우선 인간이 그런 일을 어떻게 해내는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지각, 언어, 사고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인지과학이 인공지능 연구, 로봇 연구와 밀접히 연결되어야 비로소 그런 다재다능한 인공지능 시스템, 로봇의 연구개발이 가능하다.

-둘째로 우리는 윈도우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를 늘 사용한다. 그런데 80년대 이전의 컴퓨터에는 소위 GUI(그래픽 인터페이스)라고 하는 윈도우 프로그램이 없었다. 우리가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윈도우 프로그램, 또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또는 웹 탐색 프로그램을 누가 어떤 원리로 개발하였는가? 인지심리학자를 비롯한 인지과학자들이 인지과학적 이론을 가지고 대거 참여 컴퓨터 전공자들과 함께 개발하였다.

-셋째는 각종 도구의 디자인의 효율화 문제이다. 미래에는 컴퓨터, 인터넷, 핸드폰 등이 계속하여 달라질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달라질 것인가? 각종 도구, 기기가 인간이 사용하기에 가장 편하며, 인지적 노력을 덜 들이고, 그리고도 재미있고, 즐겨쓰게 하는 방향으로 계속 달라질 것이다. 그런 방향은 어디에서 나올까? 바로 인지과학적 이론과 연구 결과에서 나온다. 인지과학과 미래의 IT기술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접목될 때에 비로소 사용하기에 편하고 효율적인 각종 디지털 도구와 일반 도구들이 개발될 것이다. 인지과학이 연결 안 된 디자인기술 개발, IT 연구개발은 눈먼 장님과 같을 것이다.
현재 국내 IT계에서 추진하는 Ubiquitous computing의 체제를 도입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여 반응/활용하는 가에 대한 인지적 모델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음; 인터넷, 컴퓨터, 핸드폰, 로봇을 비롯한 각종 도구 활용/상호작용에서의 인간 인지모형의 연결이 없이는 국제적 경쟁력있는 응용시스템 개발 불가함. 노년 관련 실버제품, 환경 개발도 노년의 인지심리적 특성 모델의 이해없이는 발전불가함. 미래사회의 관건인 인간잠재력(자원)개발도 마찬가지이다

-넷째는 인간 능력의 향상의 문제이다. 오늘날 미래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햘을 줄 것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과학 및 공학기술의 증진에 의한 인간의 건강 상태의 증진, 많은 병의 예방 및 정복, 수명의 연장 등의 물리적, 생물학적 측면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을 생각하여 보자,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연장된들, 인간의 기억, 사고력 등의 지적 능력이 지금의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다. 미래 과학기술의 큰 화두의 하나는 '인간의 심리적, 인지적 능력의 향상' 이 될 것이다. Cognitive Enhancement 라고 서구에서 언급되는 이 영역이 미래의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 영역의 하나가 되리라고 본다.
지금처럼 주의력, 기억력, 언어이해력, 논리적사고력, 창의력 등이 제한된 그러한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지적 능력들이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등에서 나온 바와 같이 급격하게 향상될 수 있는 그러한 과학기술이 개발된다면, 인간의 수명 연장 및 질병의 예방/정복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새로운 진화를 가능하게 하여 주는 것이다.
생명과학공학기술에 의하여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 급격히 향상될뿐 아니라,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지적 능력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그러한 과학기술이 형성된다면 (물론 여기에는 신경전달물질 -신경생화학-신경약물학 등의 발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인류는 또다른 변화를 겪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의 가능성 때문에 서구에서 진지하게 Transhuman 의 문제가 논의되는 것이다. 자신의 인지적 능격을 최대한으로 활용할뿐만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인지적 능력을 보이며 활용할 미래의 노인들, 젊은 학생들, CEO 들, 그리고 일반인들...을 생각하여 본다면, 이러한 방향, 즉 Cognitive Enhancement가 핵심 화두 및 기술로 대두될 미래를 위하여, 인지과학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인지과학만 발전하여서는 안되고, 생명과학기술, 정보과학기술, 나노과학기술 등이 함께 발전하여야 한다. 바로 이런한 이유에서 미래 과학기술의 틀이 융합과학기술이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과학재단고 상무성이, 그리고 유럽공동체가, 미래과학의 기술의 틀을 나노-생명-정보-인지과학 기술이 수렴되고 융합된, 융합과학기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인류 과학기술의 틀?
인지과학의 연결이 없이는, 연결고리가 빠진 그러한 틀이ek.
그러한 틀은 후진국이나 추구할 그런 시대에 뒤진 한계를 지닌 낙후된 틀이다.
그런 틀을 우리나라가 지금 채택하고 있지 않는가?

1970년대 이후 30여년간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 입안자, 결정자들이 가장 잘못한 실책의 하나는 바로 다음의 실책이다.
그 시기에, 해외에서는 물질 중심의 과학 개념을 넘어서서 인간의 마음의 연구를 컴퓨터와 연결시키고, 뇌와 연결시키는 추세가 일어나서, 심리학이 자연과학, 생명과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고, 과학으로서 발전을 시켰고, 그 추세에 가세하여 인지과학이 생명과학 -텀퓨터과학-인공지능-로보틱스-인간공학-디자인-정보과학 을 연결하는 인류과학기술의 핵심 기초학문으로 자리잡았는데, 한국과학기술 정책 입안자는 19세기 과학관을 그대로 지닌채, 심리학을, 인지과학을 과학기술로 인정하지 않고, 육성하지 않은 데에 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실책의 심대한 미래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에서 로보틱스 발전 등을 비롯한 미래 IT, BT의 인간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이러한 무지의 계속의 폐해!!!
언제나 멈추어질 것인가?

인지과학, 심리학을 모르고 미래에 세계과학기술자들과 경쟁하여야 할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