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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2, 2011

[과학적 설명의 문제]: ‘뇌과학을 넘어서’ 글에 대한 댓글의 댓글


[황순원의 ‘소나기’와 과학적 설명의 문제]: ‘뇌과학을 넘어서’ 글에 대한 댓글의 댓글
- A response to the critique of the article [Going Beyond the Bran Sciences] -
 
개인적으로 저는 1990년대에 국회에서 뇌과학촉진법 제정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였고, 그 이후 시작된 뇌과학연구 프로젝에 20 여명의 교수/박사급 연구원을 총괄하는 프로젝의 책임을 맡아 뇌과학 연구를 몇 년 진행하였기에 뇌과학의 가능성,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뇌과학은 인류 과학기술 발전에 중요합니다. 동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설명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일어나는 감흥의 내용을 그 소설 읽을 때에 뇌의 어느 부위에서 어떤 식의 신경과정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술함으로써 그 심리적 공감의 체험 현상이 설명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심적 주관적/공감적 체험 현상을(줄여서 심리현상의 체험 내용을) 신경과학적으로, 전통적인 기계론적 접근으로 과연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9월 19일에 서울대에서 과학철학자 Peter Achinstein의 과학적 방법이라는 강연 시리즈의 첫 강연이 있었습니다. Achinstein 교수는 1983년에 The Nature of Explanation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보면 과학적 설명의 개념이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고, 설명 개념이 아직도 약 20 여개의 이론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무엇인가, 어떠해야 하는 것은 아직도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많은 설명 개념 중에, 신경적 환원은 가능한 설명 개념의 하나의 후보에 지나지 않고요.
그다음에 거론되는 것은 설명적 다원성(EXPLANATORY PLURALISM)의 문제인데, 과연 신경적 환원주의가 모든 현상을 설명 가능하냐에 대하여, 과학철학자, 심리철학자들 중에는 환원주의를 지지하는 학자와 입장도 있지만 현상의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틀을 적용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봅니다.
 
세번째는 의미(Meaning)의 문제입니다. 의미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미이론에 대한 입장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의미란 별것이 아니고 지칭 대상(referents)의 특질적 속성을 논리분석적으로 기술하여 합하면 그것이 의미이다 라는 입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를 넘어선 의미 이론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서의 체험의 심리적, 내용적 의미는 그렇게 논리형식적, 기계론적 접근에 주어질 수 없는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언어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언어적 의미란 어디에서 오는가를 계속 생각하여 보았는데, 인간의 언어 의미란 1. 인간이라는 사회가 존재함의 전제, 2. 사람들의 사회적 공감의 전제, 3. 그 공감에서 서로 조금씩은 달리 의미해석이 되더라도 의사소통이 될 수 있음의 전제, 4,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의미론적, 화용론적 문법 구조, 5, 심리사회적 맥락 구조, 6. 개개인의 (그러나 공유하는 의미 구조가 있는) 이야기(내러티브)의 틀, 7, 인간의 추론적(오류가능적) 휴리스틱스 사고과정 등등 ... 을 전제함이 없이는 의미가 존재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뇌를 넘어선 심리사회적 내러티브 맥락이 비로소 의미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인간의 마음(Mind)은 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 +몸 +그 몸이 구현되고 작동하는 자연적-심리적-사회적-인공적 환경]의 총체에 있다는 “체화된 인지 또는 마음(Embodied Cognition / Mind)” 접근이 인지(심리)과학적 새 패러다임으로 최근에 떠오르고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에서 보았을 때에 (특히 의미란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하여 볼 때에) 비록 의미를 구현하는 하드웨어는 뇌의 신경적 활동이지만, 그 의미 구조 자체는 하드웨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배경에서 저는 설명적 다원성 입장을 지지합니다. 현상의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 틀을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그 현상이 자연현상과 심리사회적 현상 수준이 함께 섞여 있는 언어적 의미 현상, 심리적 체험 현상의 경우는 더욱 그렇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경과학과 그의 하위 구성부분인 뇌과학은, 과학적으로 상당히 촉망받는, 많은 중요한, 파급효과가 큰 연구결과들을 앞으로 낼 것이고, 또 그러하기를 기대하고, 과학기술 정책 면에서 적극 이를 지원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의학, 약학과 관련된 신경과학 분야의 새 발견은 인류의 미래에 많은 긍정적 함의를 지니지요.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뇌과학이 인간의 심리현상의 내용 의미구조까지 다 설명하여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내는 [의미]란 그런 기계론적 설명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의 차이를(split brain) 최초로 연구하여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 로져 스페리 교수는 이미 20 여년전에 인지과학에 의한 인지주의 [과학혁명]은 미시적(micro) + 거시적(macro)의 2원적 설명적 틀이 인류 과학 문화에 자리잡은 그러한 과학혁명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생각하여 볼 때에,
앞으로 뇌과학적 연구와 그 기여가 촉망되고, 젊은이들의 뇌과학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조장하여야 하지만, 그런다고 하여 ‘마음은 곳 뇌다.’, ‘모든 심리(사회)현상을 뇌의 신경 구조와 과정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는 뇌과학에의 과도한 쏠림, 뇌과학지상주의, 뇌과학지상문화, Thornton교수가 거론하는 ‘Brain Culture'로 빠지는 경향은 과학철학, 심리철학, 인지과학, 이론심리학, 언어의미론, 인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계간지 [시와 반시]에 [뇌과학을 넘어서] 라는 글을 썼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의 흐름과 그 글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의미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를 한 번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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