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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2, 2012

A comment on the national science & technology policies of Korea: A thought by a Korean Cognitive Scientist





 
‘넝쿨째 굴러온 당신’과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재구성

이정모가 그동안 편협한 과학관을 강조, 전파한 것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어제 토인모(토요인지과학 모임) 모임에서 서울대 장대익선생님의 meme 진화 관련 발표를 듣고 여러 선생님들과 점심을 같이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의 장대익 교수님, innoCatalyst의 김동준 대표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박정아 팀장님, 성균관대 인터랙션 사이언스 학과의 조광수 교수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의 유정 박사님 등 참석)
들은 이야기에 저는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들은 이야기의 요점은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계의 속살을 헤집고 들어가 보자면 IT 분야는 모르겠지만 다른 과학기술 분야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한국 과학기술이 보다 큰 문화 틀에서 전반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시사를 지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2003년 봄, 당시 과학기술부의 부탁을 받아 미국 과학재단(NSF)의 NBIC 융합과학기술 틀을 국내 처음 소개한 이후에,

[참고자료: 2003. 03. 17. 이정모
(2003). "융합과학기술 개발과 인지과학"/ - Science & Technology Focus; (KISTEP(한국과학기술평가원); 주간과학기술동향), 제32호, 1-11. (PDF file) / 90 K/ http://cogpsy.skku.ac.kr/cwb-data/data/injidata/%EC%9C%B5%ED%95%A9%EA%B3%BC%ED%95%99%EA%B8%B0%EC%88%A0%EA%B0%9C%EB%B0%9C%EA%B3%BC-%EC%9D%B8%EC%A7%80%EA%B3%BC%ED%95%99.pdf]

과거 일제 시대의 과학기술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한국 과학기술계의 ‘물질 중심의 과학 기술’관으로 인하여, NBIC Converging Technologies 의 서구 틀 중에서, NBIC 중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틀에서 그 핵심이었던 [인지과학기술] 분야를
한국 과학계 ‘마음대로’ 제외한 채,

- ie. 미국 과학재단의 융합과학기술 틀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 Performance의 향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지과학 기술의 응용 영역의 문제임을 한국 과학계는 이해 못하고 무시한 채,
- ie. [[ 사이버네틱스 틀의 등장과 확산 -> 인지주의 과학혁명 (+ 인공지능, 컴퓨터과학 분야 등장) -> 인류 디지털 문화 출현 및 전 세계적 확산-> NBIC 융합과학기술 틀 -> 새 Humanity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미래 과학기술 틀의 재구성 떠오름]]

의 인류 문화사적 변혁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할 엄두도 못 내고, 기존의 19세기 또는 20세기 초기의 과학과 기술 관점 중심으로 21세기 및 그 이후의 미래 과학, 기술을 추진한 채-
물질 중심의 NBI 세발전전거 틀만 추구하는 한국 과학계(이공학계, 관공기관, 대학)의 물질과학 중심의 편향적 추세를 지적한 적이 있다.

- [참고자료: 국회 미래사회연구포럼 (주최), 인지과학과 미래 학술심포지엄 발표
- '미래 융합과학기술 사회에서의 인지과학의 역할'
- 이정모, 2007. 11. 17.

그런데 이정모가 지금까지 주장하거나 발표해 온 입장이, 다른 이공계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체는 생각하지 않고 부문만 생각하며 자신의 영역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문제점이 있음을 이 토인모 뒷풀이 점심 모임을 통하여 깨달았다.

최근에 이정모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오래 컴퓨터 작업을 못하고 자주 쉬어야 했다. 그 쉬는 시간에 TV의 지난 방송을 보며 쉰다고 하다가 얽혀 들어간 것이 모 방송국의 연속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드라마였다.

토인모의 점심 모임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은 것은, 이 드라마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내러티브, 자신의 감정적 피해에만 집중하여 말하고 행동할 뿐, 그런 자기주장, 말, 행동 등이 다른 구성원과 전체에 영향 주어서 전체 가족(가정)의 ‘건강함’, 가정의 좋은 미래의 상태에 대하여는 충분히 고려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 인물도 있다.)

한국 과학기술계도, 그리고 또 인지과학기술을 강조하며 이정모가 주장하며 펼쳐온 내용들도 지금까지 그러한 편향의 폐해에 물들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미래 과학, 기술, 기업, 사회문화 일반 틀 구축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동안의 이정모가 이해하는 현재 진행되는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요점은,

ㄱ. 한국사회와 문화의 균형있는 미래 발전이라는 전체 틀 추구보다는 눈에 보이는 과학기술 발전 도모라는 편협한 조망 (미래 사회와 문화의 부분적 요소로서의 과학과 기술의 위치 및 역할 망각 : 문화라는 가족 공동체 개념보다는 특정 기술 중심의 단독적 개인적 소망 추구 편향)

ㄴ. 물질과학 중심의 과학기술관: 인문(특히 과학기술 철학), 사회과학과의 연결, 그 중요성 무시함 (있다 해도 립서비스 수준에 멈춤)
-(국내에 설립된 내노라 하는 대학들의 융합과학기술대학원들의 구체적 실체를 들여다보면 단번에 드러남)

ㄷ. 특정 짧은 시일 내에 상용화 가능한 기술 중심으로 특화하거나 중점적 지원하는 편협한 과학기술 틀
(기초과학 대신 상용 기술 중심의 치우침; 기업은 물론 대학도 마찬가지)

(SNS등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미래 인류사회문화 및 과학/기술 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음 <- 이에는 과학기술철학적 지식, ‘기계와 인간을 연결하는’ 인지과학적 지식, 미래 인류문화 및 과학기술 예측 지식 등이 크게 필요함)

이제, 어느 한 분야의 편향적 특화, 집중지원 및 다른 분야와의 연결을 무시하는 편협한 단견적 접근이 국가 과학기술 발전 그 자체를 좀먹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저해하는 것임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이 있어야겠다.

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그 파동이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할 때는 엄청난 폭풍이 된다는 물리학의 카오스 현상 뿐만 아니라, SNS 현상을 비롯한 상당히 많은 사회적 현상들이 복잡계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미루어 생각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계에서 어떤 특정 분야의 선택적 집중과 지원이라는 전략은 후진국을 벗어난 한국 사회가 추구하여야 하는 틀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인접 분야를 함께 생각하며, 함께 가며 이루어내는, 가족공동체의 미래 개념으로 한국 과학/기술계의 판을 짜고 미래를 계획하여야 한다.

한국은 NBIC 융합기술 틀에서 한국적 정책 편의상, 선택과 집중 전략의 편의상, 특정 물질 과학 분야 지원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을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그런 선형적 접근은 좋은 미래 과학기술 정책이 될 수 없다. 인지과학기술, 인문사회과학 지식을 무시하고 제외하는 (예산 구실을 대기는 하지만) 과학기술 정책은, 나비의 날개짓은 아니지만,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현재 벌써 그 증후가 나타나고 있다.) 결국은 그 물질과학 영역 자체도 커다란 손실을 입고 발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가족공동체와 같은 하나의 복잡계 현상/시스템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가기’를 생각하여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국가 과학기술 전략은 한 국가가 후진국일 때에는 타당할지 몰라도,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추구하여 가는 국가에게는 맞지 않는 전략이다.

심리학사와 이론체계를 부전공하면서 ‘history of evolution of ideas'에 계속 관심을 가져온 사람으로서, 서구에서 중세 기독교의 지적 암흑기를 무너뜨리고 문예부흥,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이태리의 문화적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 찬란한 르네상스를 이룩한 이태리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견적이고 편협한 전략이나 정책에 의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제 선진국(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적 논란이 있겠지만)으로 발돋움 하려는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발상의 전환을 하여야 하리라 봅니다.




선택과 집중의 후진국 시절의 전략에서 벗어나서





 
르네상스를 이루어 낸 그 이태리의 문화적 힘의 원동력이 되었던
개방적 마음과 생각이필요한 것이고,
 
나의 분야만이 아니고 다른 분야도 ‘함께’ 사는 ‘공동체적’ 생각의 틀이 필요한 것이지요. 미래의 복잡계적 사회에서는 ‘다른 분야가 잘 되는 것이, 곧 나의 분야도 잘되는’ 식의 ‘나눔’의 마음 갖춤새가 필요한 것이지요.
 
알렛산더 듀마의 삼총사에서의 말을 빌립니다.
 
“All for One, One for All !"
 
2012. 6. 17. 토인모 모임 다음날
 
- 이정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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